항목 ID | GC03100366 |
---|---|
한자 | 仍伐奴縣 |
영어음역 | Ingbeollohye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김덕원 |
[정의]
고구려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광명 지역에 설치된 통치구역.
[제정경위 및 목적]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427년(장수왕 15) 수도를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平壤)으로 천도한 후 적극적인 남진(南進) 정책을 실시하여, 475년(장수왕 63)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전사시키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이후에 한강 유역을 고구려 영토로 편입하기 위하여 종래 백제의 영역에 속하였던 지역을 새로운 군현(郡縣)으로 재편하면서 잉벌노현(仍伐奴縣)을 설치하였다.
[관련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 한주(漢州) 율진군(栗津郡) 조에 “곡양현(穀壤縣)은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금주(衿州)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 조에 “한산주(漢山州) …… 율목군(栗木郡)[또는 동사힐(冬斯肹)이라고도 하였다] 잉벌노현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고구려가 새롭게 재편한 군현을 어떻게 운영하였는지는 관련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지만, 행정 기능보다는 군사 및 조세와 관련된 업무를 주로 처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고구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성왕(聖王) 때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바탕으로 551년(성왕 29) 신라 진흥왕(眞興王)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회복하였으나 553년(진흥왕 14) 신라의 공격으로 이곳을 다시 빼앗겼다. 진흥왕은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활발한 북진(北進) 정책을 추진하였다. 삼국 통일 후 경덕왕이 757년(경덕왕 16) 잉벌노현을 곡양현으로 개칭하여 한주 율진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의의와 평가]
고구려가 백제 영역을 차지하고 잉벌노현을 설치한 이후 광명 지역은 한강 유역을 확보하려는 삼국의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다. 1990년 시흥 지역의 호암산성(虎巖山城)을 잉벌노현, 즉 곡양현의 치소(治所)로 추정하는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잉벌(仍伐)’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이와 관련된 조사·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