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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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明治町市場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31[금남로2가 7-1]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강별 |
개관|개장 시기/일시 | 1936년 11월 1일 - 명치정 시장 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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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45년 이후 - 명치정 시장에서 중앙시장으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명치정 시장 - 전라남도 광주부 명치정 2정목 |
현 소재지 | 금남빌딩 -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31[금남로2가 7-1] |
성격 | 시장 |
면적 | 약 1100㎡ |
[정의]
1936년 11월 1일 조선총독부령 시장규칙에 의해 전라남도 광주부에 개설된 제2호 공설시장.
[개설]
명치정(明治町) 시장(市場)은 전라남도 광주부 명치정 2정목[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2가 일대]에 있었으며, 광주 상설 시장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명치정 시장은 광주천을 거점으로 열렸던 두 개의 오일장[큰 장, 작은 장]을 병합한 사정(社町) 시장[사동시장(社洞市場)], 사정 시장을 철거하고 이를 대체하기 위해 만든 천정(泉町) 시장[지금의 양동시장]과 같이 이름난 시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명치정 시장을 방문하는 주 고객층은 일본인들로 조선인들에게는 조금 낯선 공간이기도 하였다. 당시 광주부 내의 조선인들은 광주천을 건너 이나 사동시장이나 구동시장(龜洞市場)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건립 경위]
광주에 처음 들어온 일본인들은 의병 진압을 위한 일본군과 군인들에게 일용품 등을 공급하는 군납 상인들이었다. 그러나 점차 광주가 전라남도 중부·북부 지역의 교육, 상업 및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시내에 수요를 감당할 상설 시장이 필요해질 만큼 한말 이래 일본인들의 이주가 꾸준히 증가하였다.
1937년에 간행된 『광주부세일반(光州府勢一班)』에는 명치정 시장이 개장될 당시 광주에 약 8000명의 일본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물론 명치정 시장 외에도 본정(本町)[지금의 광주광역시 황금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던 광주어채시장(光州魚菜市場)을 일본인들이 이용하였으나, 광주어채시장은 수산물을 전문으로 파는 시장이었기 때문에 채소류나 일용잡화의 거래는 주로 명치정 시장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변천]
1945년 광복 후 '명치정'이란 거리명이 금남로(錦南路)로 바뀌면서 시장 이름도 '중앙시장'으로 바뀌었다. 1968년 금남로 확장공사가 시작되면서 옛 건물이 철거되었다. 철거 직전 건물의 모습은 천장이 높은 함석 슬레이트 지붕에 내부가 훤히 뚫린 형태였는데, 이는 1914년 일제가 공포한 시장규칙(市場規則)에 따라 하나의 장옥(場屋)에 여러 개의 상점이 입주해 식료품이나 잡화를 파는 형식이었다. 금남로 확장공사를 계기로 중앙시장은 잠시 금남로3가로 옮겨졌고, 1971년 금남빌딩이 신축되면서 원래 자리로 돌아와 영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면서 시장 상권이 점차 대인시장으로 넘어가고 임대료 상승, 도심 내 상주 인구의 감소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매출이 줄자 입주 상인들이 하나둘씩 떠나 결국 1978년 폐시되었다.
[구성]
『매일신보』 1936년 11월 1일 기사에 따르면, 개시 초기의 운영 시간은 1월, 2월, 3월, 10월, 11월, 12월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5월, 6월, 7월, 8월, 9월은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었다고 한다. 주로 판매한 물품은 일본인들을 위한 일용품과 가마보코[蒲鉾], 다쿠앙[澤庵], 나라즈케[奈良漬] 등 식료품이었다. 또한, 일본인들에게 생선을 팔 때 횟감용인지 구이용인지에 따라 손질을 해서 팔아야 했기 때문에 생선가게 종사자들의 생선 다루는 실력이 전문 조리사 못지않았다. 광복 이후, 기술을 배운 일부 한국인들이 중앙시장 안쪽에 일식집을 많이 개업하였다. 광주의 최대 상가인 충장로와 가까운 위치였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도청, 검찰청, 법원, 은행 등 여러 관공서가 있어 장사도 매우 번영하였다.
[현황]
2022년 현재 명치정 시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금남빌딩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