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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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擊退-高麗將軍鄭地 |
영어공식명칭 | General Koryeo Dynasty Jeongji whom repulse Japanese pirates |
이칭/별칭 | 정준제(鄭准提),경열(景烈),퇴암(退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현창 |
[정의]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문하평리, 판개성부사, 해도도원수, 양광·전라·경상도절제체찰사 겸 총초토영전선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
[개설]
정지(鄭地)[1347~1391]는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침입하였을 때 수군을 정비하고 화포 공격으로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고려의 수군 창설자로 추앙받는 장군이다. 경상남도 남해 관음포전투에서 정지가 세운 공을 기려 경상도·전라도 사람들이 탑을 세워 '정지탑'이라고 했는데 정지탑은 남해정지석탑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정지 장군이 왜구를 격퇴한 공훈을 기리는 기념비 등이 남아 있다. 정지는 1403년(태종 3)에 경열(景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지를 모신 경열사는 훼철과 복원의 과정을 거쳐 정지장군예장석묘가 있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에 자리하고 있다.
정지장군의 유물인 정지장군 환삼은 보물로 지정되어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정지 장군의 시호를 단 광주 거리 이름이 경열로이며, 정지 장군의 9세손인 금남군 정충신의 시호를 딴 광주 거리 이름이 금남로이다. 2009년부터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해군에서 214급 잠수함 2번함을 정지함이라고 명명하고 작전 배치 운행하고 있다.
[가계]
정지의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초명은 준제(准提), 자호(自號)는 퇴암(退菴), 시호는 경열(景烈)이다. 1347년(충목왕 3)에 나주 거평 죽곡리(竹谷里)[현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안평리 죽곡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금성군(錦城君) 정성(鄭盛)이고, 아버지는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증 도첨의평리(贈都僉議評理)·상호군(上護軍) 정이(鄭履)[1322~1390]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이다. 동생은 가선대부 전라병사 전(㙉)[1350~1414]이고, 부인은 밀양박씨 사이에 아들 전라감사, 전주부윤 정경(鄭耕)[1370~1421]을 두었다. 정지 집안에서는 금남군 정충신 등 다섯 명이 군호(君號)를 받았고 다섯 명이 시호(諡號)를 받았다.
[등용 후 왜구 격퇴의 활약상]
1365년(공민왕 14)에 사마시에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지는 용모가 출중하고 성품이 너그러웠으며,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어 글 읽기를 좋아하니 대의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었다. 출입할 때는 항상 서적을 지니고 다녔다. 1374년(공민왕 23)에 이름을 지(地)로 개명하였다. 그해에 국왕 호위 업무인 속고적(速古赤|速古兒赤[元史])[시그르지|시구르치|수우꾸츠]의 중랑장(中郞將)으로 근무할 때에 유원정(柳爰廷)의 추천에 의하여 공민왕에게 평소에 품고 있던 왜구 평정 계책을 올리고 수군 창설에 진력하여 전라도안무사(全羅道安撫使) 겸 왜인추포만호(兼倭人追捕萬戶)를 제수받았다. 그때 정지가 두세 번에 걸쳐 무릇 수십 조나 되는 상소를 올리니, 공민왕이 순찰사 최영(崔瑩)을 불러 상소를 의논하게 하였다.
최영이 처음에 6도(道)를 순찰하고 전함 2000척을 건조하여 여러 도의 군사들을 시켜서 왜구를 잡게 하였다. 백성들이 이를 모두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 집을 부수고 달아나는 자가 10에 5~6이나 되었는데 정지 등이 의견을 제기하자 사태가 마침내 잠잠해졌다. 1375년(우왕 1)에 왜구의 괴수 등경광(藤經光)을 꾀어 죽이려다가 실패하여 왜구가 더욱 날뛰었다. 1377년(우왕 3) 여름에 왜적이 순천·낙안 등지를 침략하니 정지가 예의판서(禮儀判書)로서 순천도병마사(順天道兵馬使)가 되어 적 18명의 목을 베고 3명을 사로잡았다. 겨울에 왜구 40여 명의 목을 베고 2명을 사로잡았다. 1378년(우왕 4)에 왜적이 영광·광주·담양·동복 등지를 침략하니 정지가 옥과현까지 추격하였다. 옥과현 미라사(彌羅寺)로 들어간 적을 대부분 사살하고 말 100여 필을 획득하였다. 왜적이 또 담양현을 침략하니 정지가 공격하여 17명의 목을 베었다. 이어서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가 되었다. 1379년(우왕 5) 2월에는 정지가 전라남도 보성군 조양과 순천에서 왜구에게 패하였는데, 정지는 23번의 전투에서 오직 이 두 번만 패하였다.
1380년(우왕 6)에 순찰사 해도원수(巡察使海道元帥)가 되어 배극염(裵克廉)과 함께 사근애역에서 왜구 소탕 작전에 참여하였다. 1382년(우왕 8)에 왜구의 배 50척이 진포(鎭浦)로 들어오니 정지가 화포로 공격하여 왜구를 쫓아내고 군산도(群山島)까지 추격하여 배 4척을 포획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또 왜적과 싸워 크게 격파하니 우왕이 금대 1요(腰)와 백금 50냥을 하사하였다. 그해 봄철에 역병이 크게 일어나 수군의 태반이 죽었는데, 바다에서 죽은 자가 있으면 번번이 육지로 나가 장사를 지내주니 사졸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지가 병이 드니 우왕이 하충국(河忠國)을 보내어 술을 가지고 가서 위문하게 하였다. 정지는 전함 47척을 거느리고 나주와 목포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이때 장군이 남긴 시가 "박전함목포음(泊戰艦木浦吟)"이다.], 왜적의 큰 배가 120척이나 쳐들어오니 경상도 연해의 주군(州郡)들이 크게 동요하였다.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가 위급함을 알리자 정지가 밤낮으로 행군을 독려하였고 혹은 스스로 노를 젓기까지 하니 노 젓는 군사들이 더욱 힘을 다하였다. 섬진(蟾津)에 도착하여 합포의 사졸들을 징집하였는데, 적이 이미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 이르러 아군을 살펴보고 아군이 약하다고 여기며 사방을 에워싸고 전진해 왔다. 정지가 질주하여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큰 배 20척으로 선봉을 삼고 배마다 날랜 군사 140명씩을 배치한 왜적을 크게 패배시키고 화포를 쏘아 적선 17척을 불태우니 왜구들의 시체가 바다를 덮었다. 우왕이 어주를 하사하여 위로하였다. 백성들은 지휘사 정지가 아니었다면 삼도의 백성이 거의 다 없어질 뻔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정지는 병으로 사직하였다가 곧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고, 여러 도에서 전함을 건조하여 왜적을 대비하도록 청하니 이를 따랐다. 곧이어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양광도·전라도·경상도·강릉도 도지휘처치사(楊廣道全羅道慶尙道江陵道都指揮處置使)에 임명되었다.
1384년(우왕 10)에 정지가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임명되었는데, 우왕이 환자 김실(金實)을 보내어 정지를 꾸짖기를,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은 전함(戰艦)을 건조하여 수전(水戰)에 대비하고 화포를 더하여 그 계획이 주도면밀하였다. 경[정지]은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서 근래에 왜적이 주군(州郡)을 침략해도 능히 소탕하지 못하니 죄가 실로 경에게 있다.”라고 하니 정지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였다. 1387년(우왕 13)에 정지가 글을 올려 왜적의 근심을 영원히 제거할 수 있도록 대마도(對馬島)와 일기도(一岐島)의 왜구 소탕을 위하여 동쪽의 정벌[동정(東征)]을 자청하였다.
1388년(우왕 14)에 우왕이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사 이성계를 보내어 요동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정지가 안주도도원수(安州道都元帥)로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속하여 있다가 마침내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였다. 그 해 왜적이 삼도를 침략하여 도륙하자, 정지를 양광·전라·경상도도지휘사(楊廣全羅慶尙道都指揮使)로 삼아 왜구를 막아내게 하였다. 왜적이 경상도 함양으로부터 전라도 운봉의 팔라현(八羅峴)을 넘어 남원에 이르니 정지가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맹렬히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여 58명의 목을 베고 말 60여 필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리고, 왕으로부터 어주와 비단 등을 하사받았다.
[유배 후 사망까지]
1389년(공양왕 1) 8월에 양광·전라·경상도절제체찰사 겸 총초토영전선성사(楊廣全羅慶尙道節制體察使兼總招討營田繕城事)가 되었다. 김저(金佇), 변안렬(邊安烈) 등의 우왕 복위 모의 사건에 정지가 연좌되어 계림[경주]으로 유배되었다.
1391년(공양왕 3)에 귀양지를 횡천(橫川)으로 옮겼다.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정지는 청주(淸州) 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였으며 장차 준엄한 형벌로 국문하려 하였으나 대홍수가 나서 면죄 받았다. 공양왕은 정지에게 위화도 회군의 공로를 기려 2등공신으로 삼고 녹권(錄券)과 토지 50결(結)을 하사하였다. 대성(臺省)과 형조(刑曹)에서 정지가 죄를 받은 것은 사실 무고라고 아뢰어 마침내 석방되니 광주(光州)의 편방(片坊)[편방면|동명동]으로 물러나서 종신토록 밖에 나가지 않고 살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使)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하고 1391년 10월 15일에 45세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394년(태조 3) 9월 17일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조박(趙璞)의 보고를 받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심의하였다. 그 결과 판개성부가 정지가 전함을 처음으로 만들어 왜구를 격퇴하는 등의 공로가 크니 그 집을 정표(旌表)하여 후세를 권장하도록 하여 왕이 윤허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경열(景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403년(태종 3)에 박석명(朴錫命)은 정지가 새로운 전함을 만들어 왜구를 물리치는 등의 공로를 들어 상소하자, 정지 후손 정경(鄭耕) 등을 서용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아들 정경은 전라도병마도절제사, 전라도관찰사, 내시위이번절제사, 전주부윤 등이 되었다. 1477년(성종 8) 4월 16일에도 선군(船軍)의 창설(創設)이 정지로 비롯되었다고 하며 정지와 최무선의 자손을 녹용(錄用)할 것을 건의하여 교지가 내려졌다.
경열사는 『해동지도』 등에 '경열사(景烈祠)'라고 그림과 함께 나오고, 『지승』 등에는 '편방사(片坊祠)'라고 그림과 함께 표기되어 있으며, 『광주지(전)』(1964)에는 "편방사(片坊祠)가 주의 동쪽 2리에 있다"고 하였다. 편방사란 편방면에 있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현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로 14번길 19-4]에 있었던 경열사를 의미한다. 경열사의 위치는 세 곳이지만 현재는 두 곳에 경열사가 있다.
경열사의 창설에 대하여서는 약간 다른 기록이 보이고 있다. 1394년(태조 3)에 전라도 도관찰사 조박의 보고로 정지 장군 집[광주 정지장군이 사는 곳]을 정표(旌表)한 것이 정지 장군 정려의 최초 기록이다. 당시에 정지 장군은 광주에 거주하였으므로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편방사[경열사]의 전신으로 보인다. 사단법인 정지장군유적보존회의 『정지장군약사』(1981)에는 1644년(인조 22)에 전라·경상·충청 삼도 선비들이 전남 광주에서 경열사를 창설하고 배향하였다고 하였다. 『문헌비고』, 『전고대방』와 『광주향교지』(1987)에는 경열사를 1645년(인조 23)에 세웠다고 한다.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1759)에는 1705년(숙종 31) 충청도 사림이 발의하고 삼남의 사람들이 의논하여 광주 편방면에 사당을 세웠다고 하였다. 『광주목지』(1799)에는 "편방사우(片坊祠宇)는 주 동 2리에 있고 처음에는 정지를, 후에 충무공 정충신을 배향하였으며 사액은 못 받았다."고 하였고, 『광주읍지』(1899)와 『광주지』(1964)에는 편방사는 1644년(인조 22)에 세워 정지 장군과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증 판서 전상의, 송암 유평을 모셨다가 후에 충무공 정충신,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을 추가로 모셨다고 하였다.
이후 경열사는 몇 차례 사액을 청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200년이 넘게 춘추제향을 올리다가 1871년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고, 1893년에 경열사 터에 '경열사유허비'를 세웠다. 1914년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75에 외삼문과 좌우에 경신재(敬信齋), 척서정(陟西亭)이 있는 경열사[전라남도 기념물 제196호]을 복설하고 제향하다가 1976년 중수되었는데, 경열사의 현판은 김규진이 썼으며 채용신이 정지 영정을 그렸다. 또 하나는 정지장군유적보존회에서는 1979년부터 3년간에 걸쳐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정지장군예장석묘 오른쪽에 경열사를 복원하고 경열사유허비를 옮겨 세웠다. 경열사는 팔현을 모셔 팔현사로 불렸는데 지금은 정지장군만을 모시고 있다. 1980년에 경열공 정지장군 사적비(景烈公鄭地將軍事蹟碑)를 세웠다.
정지장군예장석묘(鄭地將軍禮葬石墓)[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176]는 석조로 된 사다리꼴 묘로 묘비와 상석, 석인 2기가 있는 고려 후기의 무덤 양식이다. 묘비는 1808년에 세웠으며, 1975년 정지장군예장석묘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3월에 광주광역시 북구 경열사 경내에 유물관을 세웠다.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에 있는 ‘정지석탑'은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1383년의 관음포전투에서 정지의 공을 기리는 경상도·전라도 사람들이 탑을 세워 '정지탑'이라고 일컬으며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42호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기준 명칭은 '남해 정지석탑'으로 변경되었다.
정지의 시호를 딴 거리 이름으로 경열로가 있는데,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광주역 앞 교차로에서 광주광역시 서구 농성로76 공무원연금공단 앞까지 총 2.9㎞에 이르는 도로의 이름이다. 또한 금남로(錦南路)는 정지의 9세손인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1576~1636]을 기리는 도로명이다.
1977년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상가리 579-1번지 임진성 기념각 앞뜰에 '경열공정지장군사적비'를 세워 관리하여 오다가 기념각이 폐허가 되자, 남해군과 협조하여 2004년 4월 하순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상기리 임진성(壬辰城) 주변으로 옮겨 보존하였으나, 임진성 기념각에 봉안하던 최영(좌측), 정지(중앙), 이순신(우측) 등 세 분의 영정이 지금은 없어졌다.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해군에서 명명한 214급 잠수함 2번함이 정지함인데, 2008년 인수된 이후 전력화 과정을 거쳐 지난 2009년부터 작전 배치되어 운행되고 있다. 2016년 3월 26일에는 정지 장군이 1378년에 옥과현 장파봉 아래 미라사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여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남양리 장파봉 아래 겸면목화공원 국도변에 '정지장군 옥과 미라사 대첩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관련 유물]
정지 장군의 투구, 칼 등은 충장공 김덕령이 빌려가 갖추어 입고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투옥되어 죽자 투구와 칼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철판과 철제 고리를 엮어 만든 경번갑으로 일면 '정지장군 환삼(鄭地將軍環衫)'이라고도 하는 '정지장군 갑옷(鄭地將軍甲-)'만 정씨 문중에 전하여 내려오다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정지장군 갑옷(1963)으로 지정되어 광주역사민속박물관에 보관되고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광산현 인물조에 "본조 정종(定宗) 3년에 위화도 회군의 공을 기록하여 정지에게 철권(鐵券)을 내렸다." 고 하였으나 철권에 관한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정지 장군이 남긴 시로는 "박전함목포음(泊戰艦木浦吟)"과 "고령객관음(高靈客館吟)" 2수와 『이둔촌집(李遁村集)』에 상공시(上公詩) 2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