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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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成述 |
영어공식명칭 | O Seongsul |
이칭/별칭 | 오인수,죽파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출신으로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오성술(吳成述)[1884~1910]은 1884년(고종 21) 5월 15일 전라도 나주목 삼가면 죽산리 죽산마을[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송암동]에서 오영선(吳榮善)과 나주임씨(羅州林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성술(聖述), 호는 죽파(竹坡), 본명은 인수(仁洙)이다. 오성술은 의병을 일으키고 체포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전라남도 및 광주 지역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상황에 따라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기도 하였고, 김태원(金泰元)·기삼연(奇參衍)·전해산(全海山) 의병장 등과 연합을 이루기도 하면서 일본군과 일본인 지주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활동 사항]
오성술은 여덟 살 때부터 인근의 유생 양상하(梁相賀)와 오준선(吳駿善)에게 수학하였다. 1905년 7월, 21세의 나이에 종9품 참봉(參奉)을 제수받고 관직에 나갔다. 1907년 2월, 최익현(崔益鉉)의 강회 참석 후 귀향하여 의병을 일으켜, 용진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을 근거지로 2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후 김태원 의병장과 합진하여 활동하였고, 기삼연을 창의대장(倡義大將)으로 하는 연합 의진인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907년 9월 23일 오성술과 김태원은 전라북도 고창군 문수암(文殊庵)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여세를 몰아 고창읍성을 탈환하였다. 그해 12월 7일에는 호남창의회맹소의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 탈환전에도 참여하였다.
1908년 1월 1일 오성술이 참여한 호남창의회맹소는 전라남도 창평군 무동촌(茂洞村)[지금의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무동리] 전투에서 일본군 광주지구 수비대장 요시다카츠미츠라[吉田勝三郞] 소좌와 가와바타[川端] 조장(曹長)[하사관 계급] 및 3등병 수 명을 사살하였다. 이어 1월 10일 오성술은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남도 광주군 마지면 반촌[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비아동]에 있는 일본인 지주 사구마치미츠라[佐久間時三郞]의 농장을 공격하여 소각하였다. 같은 해 12월 29일 친일 주구배(走拘輩) 황도현(黃道玄)을 전라남도 나주군 관동면[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봉동 산중에서 처단하였다. 이듬해 2월 4일에는 나주군의 친일 밀정 나귀종(羅貴宗)도 처단하였다.
호남창의회맹소의 항쟁이 격화하자 일본군은 기삼연 의병장을 붙잡아 1908년 2월 2일 총살하였고, 4월 25일에는 김태원 의병장마저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부터 호남창의회맹소 소속 의병부대들은 소규모로 나뉘어 이합집산하며 전투를 벌였다.
1909년 1월 1일 오성술의 의병부대는 전해산 의병장과 합동 작전으로 전라남도 나주의 고막원(古幕院) 헌병분파소를 공격하여 무기류를 노획하였다. 이후 오성술의 의병부대는 다시 광주 용진산으로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이후 1월 30일 광주군 대기면에 살던 일본인 모리주우치[森十內]의 집을 습격하여 2500엔 상당의 물품을 몰수하고, 다음날 모리주우치의 농장을 소각하였다.
1909년 3월 8일 오성술의 의병부대는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 거성동에서 심남일(沈南一)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다수의 일본군을 살상하였다. 7월 20일 함평군 적량면 대명동에서 다시 한 차례 매복전을 펼쳤다. 이즈음 일본은 의병 활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남한대토벌작전이다.
1909년 8월 영산포헌병대는 오성술의 의병부대가 당시 나주 용문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요시무라[吉村] 중위가 이끄는 일본군 헌병대는 근거지를 급습하여 오성술을 체포하여 영산포헌병대에 감금하였다.
1910년 6월 17일 오성술은 광주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9월 15일 대구감옥에서 26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