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8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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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孝友 |
영어공식명칭 | Han Hyowoo |
이칭/별칭 | 희중(希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창우 |
[정의]
조선 전기 주서, 사간원정원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효덕동의 옛 이름인 ‘효우동’을 있게 한 인물.
[가계]
한효우(韓孝友)[1531~?]의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자는 희중(希仲)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한숙(韓俶), 할아버지는 한세침(韓世琛), 아버지는 통례(通禮) 한원(韓垣)이고, 어머니는 이존관(李存官)의 딸이다.
[활동 사항]
한효우는 1555년(명종 10)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입격하고, 3년 뒤인 1558년(명종 13) 문과에 급제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침(陵寢)을 옮길 때 주서(注書)로서 공을 인정받았고, 이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1566년(명종 21) 병조정랑(兵曹正郎)에 임명되었다. 선조 대에는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수관으로 이름을 올렸다.
1582년(선조 15) 명 황제의 조서를 반포하기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의 사신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본 일이 있었는데, 선조가 관련 관원들의 미숙한 일 처리에 노하여 당시 사예(司藝)로 재직 중이던 한효우를 비롯한 몇몇 관리를 옥에 가두었다. 이 사건 이후로 한효우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보이지 않는다. 한편, 1924년에 간행된 『광주읍지(光州邑誌)』에 따르면, 한효우의 “효우(孝友)가 심히 지극하니 후인들이 마을 이름을 효우동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에 효덕동이라는 행정구역이 있는데, 이곳의 옛 이름이 ‘효우동’이었으며 이 효우동이라는 지명이 바로 한효우의 지극한 효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