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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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椒 |
영어공식명칭 | Lee Cho |
이칭/별칭 | 숙명(叔明),물헌(勿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고려 후기와 조선 전기에 광주 지역 출신으로 형조정랑, 나주교수관, 지고부군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이초(李椒)[1372~1442]의 본관은 광산이다. 이초의 할아버지는 한림공(翰林公) 이숙백(李淑白)이며 아버지는 이순(李順)이다. 동생은 이매(李梅)이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공조참판(工曹叅判)을 지냈다. 아들은 이급(李伋)이며 사정(司正) 벼슬을 하였고 문장(文章)과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1990년대 도시화 이전까지 이초의 후손들이 광주광역시 운암동 대내마을, 용산마을에 살았다.
[활동 사항]
이초는 1393년(태조 2)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08년(태종 8년)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사신을 맞는 예를 수행하였다. 1414년(태종 14) 형조정랑(刑曹正郞) 재직 당시에 황단유(黃丹儒)와 박송비(朴松庇) 사이의 노비 문제를 잘못 판결하여 처벌받았으나, 집이 가난하여 용서받았다. 하지만 1417년(태종 17)에 이 판결 문제가 재차 거론되면서 나주교수관(羅州敎授官)이었던 이초는 의금부(義禁府)에 하옥되었다가, 1418년(태종 18)에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 1427년(세종 9) 지고부군사(知古阜郡事)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세종 17) 지안악군사(知安岳郡事)에 임명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황해도조에는 이초가 지은 시가 남아 있다. 이 밖에 이초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