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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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이칭/별칭 | 동학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갑오농민운동,동학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노성태 |
[정의]
1894년(고종 31)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심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개설]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은 처음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농민봉기와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정읍 황토현(黃土峴)과 장성 황룡촌(黃龍村)에서 지방군과 정부군을 각각 격파한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후 정부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하고 집강소(執綱所)가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에 설치되었지만, 공주 우금치(牛金峙)와 장흥 석대들에서 패배하면서 농민군의 뜻이 좌절되었다.
[역사적 배경]
개항 이후에도 지방관의 수탈이 계속되고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에 따른 세금의 증가, 일본과 외세에 대한 반감 아래 농민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1894년(고종 31) 1월 전라도 고부에서는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수탈과 횡포에 반발하여 동학 접주(接主)였던 전봉준(全琫準) 등의 주도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새로 온 군수가 농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하자 농민들이 해산하였다. 그러나 정부에서 파견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李容泰)가 봉기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을 탄압하자 전봉준은 이웃 고을의 동학 지도자 손화중(孫華仲)과 손잡고 전라도 무장[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경과]
전라도 광주 지역에 동학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1894년 3월 말에 있었던 백산(白山) 대회에 광주 출신의 강대열(姜大悅), 박성동(朴成東), 김우현(金佑鉉)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전라도 광주 지역에도 적지 않은 동학교도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주화약 이후 광주 관아에 집강소가 설치된 시기에는 손화중과 최경선(崔景善)이 광주 지역을 통할하였다. 1894년 9월 전봉준은 재기포(再起捕)를 준비하면서 광주에서 집강소 활동을 벌이고 있던 손화중에게도 삼례로 오라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손화중은 일본군이 바닷길로 해안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광주에 남아 지키기로 하였다. 『동학사』 등에는 광주의 농민군 지도자로 박성동(朴成東)과 염세환(廉世煥)을 지적하고 있지만, 이들은 손화중의 지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광주 농민군은 전라도에서 농민군이 함락하지 못한 나주를 함락하기 위해 나주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집강소 시기인 1894년 7월 5일 최경선은 광주 농민군을 이끌고 나주 서성문(西城門)을 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제2차 기포(起捕) 후에도 손화중은 오권선(吳權善)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나주성을 공격하기로 하고 10월 15일 무렵부터 나주 동쪽 20리[약 8㎞] 지점인 침산(砧山)과 송정리 옆의 선암(仙巖), 북쪽의 용진산(聳珍山) 일대에 진을 치고, 10월 21일부터 나주 수성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또 농민군이 패하였다.
11월 초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등은 무안 농민군과 함께 나주를 공격하기로 하고, 광주 두동(斗洞) 등지에 주둔하였다. 광주의 손화중·최경선과 나주의 오권선이 이끄는 농민군은 북쪽 지역에서, 무안의 배규인(裵奎仁)은 서남쪽 함평 고막포(古幕浦)에서 동시에 나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나주 수성군은 11월 12일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용진산 일대의 농민군을 공격하였고, 나주 수성군의 공격에 패한 농민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손화중이 이끈 광주 농민군은 11월 27일 광주 관아를 점령하여 머무르고 있다가,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하고 떠났다.
[결과]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농민군이 해산한 후 접주 중에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주윤철(朱允哲), 박윤화(朴允化), 정수해(鄭水海), 이봉조(李奉祚), 허인(許仁)과 접주인 백반석(白般石)·이여일(李汝日)·김찬숙(金贊叔)·이선규(李先圭)·심필중(沈必仲)·박윤식(朴允植), 그리고 손화중의 기포장(起包將)이었던 최서중(崔西仲) 등 20명 정도가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의의와 평가]
고부 농민 봉기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전라도 광주 지역의 농민군은 뒤에 의병 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