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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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鳳德里古墳群 |
영어음역 | Gochang Bongdeok-ri Gobungun |
영어의미역 | Tumuli of Bongdeok-ri, Gocha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산 47 일원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최완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5년 9월 24일 - 고창 봉덕리 고분군 사적 제531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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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창 봉덕리 고분군 사적 재지정 |
성격 | 고분 |
양식 | 굴식 돌방|구덩식 돌방|옹관|돌덧널 |
건립시기/연도 | 백제시대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산 47 일원 |
소유자 | 사유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에 있는 백제 고분군.
[위치]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남쪽에 위치한 태봉[110.4m]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정상부 및 말단부에 있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의 동쪽으로는 계단식 농경지 및 태봉에서 뻗어 내린 가지능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사당제마을과 사근제마을이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후동마을이, 북쪽으로는 고창-아산간 국도 15호선이 동서로 지나가고 있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구릉 말단부에 해당하는 만동마을 서쪽에 2기[1·2호분], 후동마을 북쪽 능선 정상부에 2기[3·4호분]가 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1998년 처음 발견된 이후, 2000년에 고창군 내의 분구묘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가 실시되어 이 일원에 총 4기의 고분이 확인되었다. 고창군에서는 고분군에 대한 정비 보존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기초 자료 확보 차원에서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 있는 고분의 정확한 규모와 성격을 밝히기 위하여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2008년 10월 23일부터 12월 31일까지 1차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2009년 6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2차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 대한 1차 및 2차 발굴 조사 결과 분구 내부에서 돌방 5기와 옹관 2기의 매장 시설과 함께 같은 시기에 조영된 주구가 확인되었다. 또한 분구묘 조성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소형 돌덧널 9기가 확인되었다. 2015년 9월 24일 사적 제53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분구의 평면 형태는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으로, 정상부는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외형상으로 확인된 분구의 규모는 장축 72m, 단축 50m, 높이 7m 내외이다. 조사 전에 일부 매장 시설의 석재가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어 분구의 삭평이 상당 부분 진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분구의 성토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자연 구릉의 4면을 삭토하여 평면 장방형의 형태로 묘대를 조성한 후, 약 10~60㎝ 내외의 회색계 점질토[목탄 및 토기편 혼입]을 분구의 상면에 성토하였다. 일부 단면 조사를 통해서는 분구 성토 이전의 자연구릉 상부에 기둥구멍과 노지 등이 노출됨으로써 집자리와 같은 선행 유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성토한 후 분구 중앙에 5호 돌방의 축조와 동시에 성토가 이루어졌는데, 5호 돌방의 분구는 현 분구의 평면과 규모가 같다. 이렇게 성토한 후 가장 먼저 5호 돌방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분구 성토가 이루어졌는데, 5호 돌방의 분구는 현 분구 평면과 규모가 같다.
1호·2호·3호 돌방을 안치하는 데 있어서는 5호 돌방이 축조될 당시에 조성된 원래 분구를 각각의 돌방 평면보다 여유 있게 되판 다음, 돌방의 석축과 동시에 분구를 성토하였다. 따라서 1호·2호·3호 돌방이 안치됨에 따라 전체적인 분구의 평면 형태는 크게 변하지 않았으나 높이에 있어서는 점차 고대(高大)해졌을 것이다.
한편 4호 돌방의 경우는 1호·2호·3호와 달리 돌방의 평면 규모와 거의 같은 규모로 5호 돌방의 초축 분구를 되판 다음 안치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분구의 성토와 관련해서 돌방의 축조 순서를 살펴보면, 5호 돌방이 분구의 조성과 더불어 가장 먼저 안치되었고, 그 다음은 4호 돌방, 1호 돌방, 3호 돌방, 2호 돌방 순으로 축조된 것으로 파악된다.
돌방은 분구 중앙의 5호 돌방을 포함하여 모두 5기가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파괴가 심해 형식을 알 수 없는 2호분을 제외하고 굴식 돌방이 3기[1호·3호·5호]이고 구덩식 돌방이 1기[4호]이다. 전체적인 축조 방법은 5호 돌방과 같이 묘실을 안치하기 위한 평면을 회색계 점질토로 정지하고, 벽석의 축조와 동시에 분구를 성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4호 돌방의 경우 동쪽[경사면] 정지층 일부가 5호 돌방의 정지층을 일부 굴광한 흔적이 확인되는데, 이는 4호 돌방이 5호 돌방과 거의 같은 높이에 묘실의 바닥을 두고 있는 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체적인 축조 방법은 개별 돌방의 축조와 동시에 개별 성토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벽석의 축조는 모두 할석을 이용하여 축조하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으나, 세부적인 수법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즉 석재의 치석 정도는 3호, 1호, 4호, 5호 순이며, 1호·3호·5호 돌방이 벽석의 빈틈을 작은 할석이나 점토로 정연하게 처리한 반면, 4호 돌방은 벽석을 전체적으로 축조한 후, 내부에서 빈 틈새에는 작은 할석으로 끼워 보강하고 있다.
돌방의 장축 방향은 널길과 피장자의 두향으로 볼 때 1호 돌방이 남북 방향인 반면, 3호·4호·5호 돌방은 동서 방향으로 확인되었다. 묘실의 평면은 방형[1호·3호]과 장방형[4호·5호]으로 구분되며, 5호 돌방의 경우 모서리각을 둥글게 조정한 것이 특징적이다.
바닥은 2호 돌방을 제외한 나머지 돌방은 바닥에 부석(敷石) 시설을 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1호와 5호가 작은 천석과 할석을 사용한 반면, 3호와 4호는 편평 할석을 바닥앞면에 부석한 이후에, 부석 사이에 작은 할석과 천석을 시설한 세부적인 차이점이 확인된다.
널길은 굴식 돌방[1호·3호·5호]의 경우 모두 중앙에 시설하였으며, 묘실과 널길 경계에 단을 마련한 유단식(1호·3호) 널길의 경우 1호는 할석을 사용한 반면, 3호는 장대석의 문지방석을 시설한 세부적인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묘도는 공통적으로 묘실로 좁아지는 ‘팔(八)’자상으로 점차 낮아지는 형태로 확인되었다.
옹관은 분구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2기가 확인되었다. 2기 모두 성토층을 굴광하여 조성한 것으로, 약 2m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1호 옹관은 조사 결과 옹형 토기와 파수부호가 합구된 형태로 확인되었으며, 2호 옹관은 대부분 유실되어 몸통과 바닥 일부만 잔존해 있다. 1호 옹관 내부 토기편을 제거한 결과 암키와 4매가 수키와 2매 위에 놓여 있었다.
파수부호 아래에서 옹형 토기와 수평을 맞추기 위한 할석 2매와 호형 토기 바닥편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옹형토기 내부 암키와 4매 위에서 구슬 일부가 확인되었다. 1호 옹관 옹형 토기 경부 및 2호 옹관 서쪽 부분에서는 논흙이 약 5㎝ 정도 두께로 쌓여 있었다.
돌덧널은 분구 정상부의 남사면[1기]과 남사면 하단부에서 8기 등 총 9기의 소형 돌덧널이 확인되었다. 남사면 하단부에서 확인된 돌덧널은 토층 양상으로 볼 때 주구 내부에 분구의 성토층인 적갈색계, 혹은 암갈색 사질 점토가 일정 부분 퇴적이 이루어진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돌덧널의 주변으로는 분구 정상부의 돌방에서 흘러내린 할석이 무질서하게 노출되고 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분구묘와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후대의 돌덧널로 추정된다.
돌덧널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 방향과 직교하는 남북 방향이며, 대부분 경사면인 남단벽은 유실되었다. 현재 돌덧널 대부분은 벽석의 경우 1단 내지는 2단만이 잔존하고 있으며, 벽석의 축조 역시 정연하지 못하나 잔존하는 양상으로 보아 앞트기식의 돌덧널로 추정된다. 다만 특징적인 것은 바닥면의 처리를 할석, 혹은 기와, 그리고 토기편 등을 이용한 부석 시설을 꼽을 수 있다.
주구는 민묘가 조성되어 있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탐색 트렌치를 설정하여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유물이 집중 출토되고 있는 서쪽 일부와 후대의 돌덧널이 조성된 남쪽 일부는 평면 제토하여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삼면 모두에서 주구의 윤곽선이 확인되었다. 다만 북서 모서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는 후대에 개설된 임도로 인해 상당 부분 원래 지형이 삭평된 점을 감안하면 원래 주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구의 단면 형태는 완만한 ‘U’자상으로, 규모는 상대적으로 2호분과 연접한 남쪽[최대 너비 5.1m, 깊이 2.4m]과 서쪽[최대 너비 6.7m, 깊이 1.1m]이 북쪽[최대 너비 3.5m, 깊이 1.7m]에 비해 상대적으로 넓다. 이는 북쪽에 개설된 후대의 임도로 인해 주구의 상면이 삭평된 데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토층의 경우 하층에는 전반적으로 물과 관련된 모래층과 니질토가 반복적으로 퇴적된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상층은 분구의 성토층이 흘러내려 퇴적된 적갈색 및 암갈색 사질 점토가 할석과 함께 확인되었다. 내부 토층의 퇴적 양상으로 볼 때 남쪽 주구는 최소 두 차례, 북쪽은 한 차례 정도 주구 내부의 재차 굴착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내부 출토 유물은 전반적으로 상층인 적갈색 및 암갈색 사질 토층에서 집중 출토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물로는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유공광구소호, 원통형 토기편, 대형 옹관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남쪽 주구 내부 상층에서는 중국제 청자 호편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또한 대형 옹관편이나, 완형의 토기 등이 내부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일련의 제의 행위가 주구를 중심으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
매장 시설인 돌방에서는 금동식리, 금제이식, 동제탁잔, 죽엽형 장신구, 성시구, 안교, 등자, 재갈, 덩이쇠, 쇠도끼, 쇠끌, 쇠투겁창, 쇠낫, 교구, 널못 등의 금속류와 중국제 청자반구호, 소호 장식유공광구소호, 그릇받침, 뚜껑접시, 굽다리접시, 아가리큰항아리[광구호], 유공광구소호, 병형 토기, 기와 등의 토기류, 그리고 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옹관에서는 기와와 구슬 등이 출토되었으며, 돌덧널에서는 교구가 출토되었다. 주구에서는 중국제 청자편, 그릇받침, 굽다리접시, 뚜껑접시, 원통형 토기편, 대형 옹관편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1·2차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문위원회의 회의 결과 사적 지정 및 사회교육 자료로의 활용이 요구됨으로써 이에 대한 조치를 고창군, 전라북도,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진행하고 있다. 고분군의 정비 보존 계획을 위해서는 추가적인 발굴 조사가 요구된다.
[의의와 평가]
고창 봉덕리 고분군의 중심 연대는 출토 유물 및 매장 시설 등으로 보아서 5세기 초·중기를 중심 연대로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출토 유물 가운데 중국제 청자, 혹은 청자편은 현재까지 분묘 유적에서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출토가 이루어졌으나, 고창 봉덕리 고분군에서 중국제 청자 출토는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4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식리, 금제이식, 중국제 청자반구호, 대도, 성시구 등과 5호 돌방에서 출토된 금동식리편, 대금구 등의 출토 유물로 볼 때, 고창 봉덕리 고분군의 조영 주체는 마한 모로비리국의 중심 세력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 영역화 이후에도 상당한 정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고창 봉덕리 고분군은 백제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