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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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漢文學 |
영어음역 | Hanmunhak |
영어의미역 | Chinese Literatur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송영래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한문으로 된 한시, 학문, 한학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개설]
고창에서의 한문학은 고려 초에 본이 흥덕인 장연우(張延祐)에서 부터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당시 중앙에 고창 인맥층이 두터워지면서 오세재(吳世才) 등 한문학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에 오면서 중앙 정계에 진출이 약해졌으나 유학이 진보를 거듭하여 김경희(金景熹), 김질(金質), 오희길(吳希吉), 유운(柳澐), 황윤석(黃胤錫), 송태회(宋泰會) 등 발전의 맥을 이뤄 한문학의 꽃을 피웠다.
[주요 학자 및 문인]
1. 장연우[950~ ?]
흥덕장씨 시조 장유(張儒)[광평시랑]의 아들이다. 본이 고창 흥덕이며, 벼슬이 호부상서에 올랐다. 그는 「강릉경포대음」이라는 시 한 수를 남겨 오늘에 전한다. 처음엔 한문이 아닌 가림 다문자[한글의 전신 문자]로 썼는데, 그 연유는 그가 중국을 가게 되는데 그때 가림 다문자가 새겨진 거문고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이 문자를 이상히 여겨 풀이해 줄 것을 부탁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오늘에 남아 역사서인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전해 온다.
2. 오세문(吳世文)[1130~ ?]
고창오씨의 후손으로 고려 후기의 문인이다. 유학을 세업으로 하여 형 오세공(吳世功), 아우 오세재와 함께 3형제가 모두 학자이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1152년 승보시에 장원 급제하여 옥당에서 의종을 보필하였으며 낭중, 비승, 감사사 등의 관직을 거쳐 명종조에는 동각시학에 보임되었다. 또한 보문각 직학사를 맡아 경적(經籍)과 사서(史書)를 강론하였다. 저작으로는 「역대가(歷代歌)」, 「군충기(羣蟲記)」, 「조수론(潮水論)」 302수의 운시(韻詩) 등이 있다. 「녹양역운」만이 『보한집(補閑集)』, 『세보』 등에 전한다.
3. 오세재[1133~ ?]
고창오씨로 자는 덕전(德全) 호는 복양(僕陽)으로 1133년(고려 인종 1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심하여 명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평장사 한문준을 모시고 구경백가를 달통하였다고 한다. 당시 현유인 이인로(李仁老)·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함께 죽림고회를 조직하여 시작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문은 한유(韓愈) 두보(杜甫)의 체를 본받고 이규보(李奎報)와 친하였으며, 한시 「천마령음」이 『보한집』에 전해 온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문선(東文選)』에 5언 율시 2편, 7언 율시 1편이 전해 온다.
4. 윤소종(尹紹宗)[1345~1393]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헌숙(憲叔), 호는 동정(桐亭)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1365년(공민왕 14)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수찬(修撰)을 지냈다. 이어 정언(正言)이 되어 환관이나 궁녀 등의 잘못된 행실 등을 논한 소를 올렸다가 파직되었다. 우왕 초에 전교사(典校寺)의 승(丞)·부령(副令) 등을 지냈고, 1386년에 성균관사예로 기용되었다. 1393년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고, 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 춘추관동지사 등을 지내면서도 평생토록 상소를 잃지 않았다. 성리학과 경사(經史)에 밝고 문명이 높았다. 문집에는 『동정집(桐亭集)』이 있다.
5. 김질[1496~1555]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효자로서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좌의정 김사형(金士衡)의 6세손이고 통례원통찬 김복동(金福童)의 아들이다. 1496년(연산군 2) 1월 15일 무장(茂長)[현 고창군 공음면] 갑촌(甲村)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고, 학업에 전념했다.
1523년(중종 18) 28세 때 부친상을 당하자 상례의 절차를 문공의 『가례(家禮)』대로 치르고 3년의 시묘를 지성으로 거행했다. 1528년(중종 23) 33세 때 모친의 명에 의하여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1543년(중종 38) 48세 때 모친상을 당하자 3년의 시묘를 부친 때와 같이 거행했다. 그는 상복을 벗자 여막의 자리에 서실을 짓고 학문에 힘쓰며 『소학(小學)』, 『가례』, 『효경(孝經)』 등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
몸이 늙어감에도 모여드는 문생들에게 예경(禮經)과 제의(祭儀) 등을 강론하여 효제를 권면하니 호남 호서의 많은 문도들을 훈도한 바가 많았다. 1555년(명종 10)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0세였다. 사후 고향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으며, 시문으로 「영모록(永慕錄)」과 「자계(自戒)」, 「육잠(六箴)」 등의 시 2수가 『영가세적(永嘉世蹟)』에 실려 전한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당집에 ‘영모당(永慕堂)’이라 써서 걸고, 또 시를 지었다.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무장 현감으로 내려오자 서로 교유하면서 「영모당기(永慕堂記)」를 지었다. 당시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과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1519~ ?] 등도 그를 추앙하며 종유했으며, 학자들은 그를 영모 선생이라 불렀다.
1605년(선조 38) 중국에서 우리나라 행의[東國行誼]를 채집할 때 그를 으뜸으로 천거하여 명나라에서 정표(旌表)를 내렸으니 그는 분명 출천의 효자이고 유학 정신을 몸소 실천한 산림 처사였다. 그의 학문과 행의는 그의 후손에 계승되어 충효로 명망이 높은 자가 속출하였다. 1882년(고종 19) 향리인 공음면 칠암리(七岩里)에 도암서원(道巖書院)을 세우고 주벽으로 배향했다. 현충문 안의 영모당에는 김질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포암(圃巖) 윤봉조(尹鳳朝)[1680~1761]가 「영모당 김선생 행장」을 지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 비문을 찬술하고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1835~1919]이 ‘영모당’ 현판을 썼다.
6. 김안절(金安節)[1514~1589]
천자국임을 자처하던 중국의 명나라, 그 중에서도 유별나게 학문이 깊고 도학에 정통한 세종황제를 감복케 하여 우리 왕통의 체통과 권위를 되찾은 사람이 김안절이다. 그의 자는 의신(義臣), 호는 사헌(沙軒)이며, 관향은 상산(商山)이다. 어려서부터 천품이 맑고 재질이 뛰어나며 그 행실이 단정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출사함에 이르러서는 그의 인품과 문장이 널리 알려져 선비들 사회에 크게 회자되기도 하였다. 28세에 양성(陽城) 현감을 거쳐 31세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인종의 즉위를 위한 상주 사절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명나라 세종황제로부터 서사천질(書史千秩), 단계연(端溪硯), 금잔옥배(金盞玉杯) 등을 하사받았다. 후손이 경향(京鄕) 선비의 찬사(讚詞)를 모아 『보연시집(寶硯詩集)』을 간행하였다.
7. 김경희[1515~1575]
호는 노계(蘆溪),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고수면 행정촌에서 출생하였다. 외숙부 양팽손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숙성하였다. 김경희는 1534년(중종 29)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1545년(명종 즉위)에 있었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중종이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 한 수를 친히 써서 김경희에게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노계집(蘆溪集)』 등 많은 시작을 남겼다.
8. 유운[1548~1611]
호는 석탄(石灘), 본관은 고흥(高興)으로 1548년(명종 3)에 한성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고창으로 입향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나가지 않고 향리인 고창에 은둔하면서 학문에 힘쓰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특히 정자를 지어 꽃과 나무를 심고 학문에 힘써 당시 선비들이 추종했다. 그는 「석탄정감춘(石灘亭感春)」, 「퇴사시(退仕時)」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9. 오희길(吳希吉)[1556~1625]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길지(吉之), 호는 도암(韜庵)이다. 김인후(金麟厚), 기효간(奇孝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선조가 오희길의 정여립과의 절교장을 보고 ‘호남일사(湖南一士)’라 친히 써서 하사하였다. 그는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태조의 영정과 역대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전란으로 다른 사고의 실록은 모두 없어졌으나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방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 실록을 아슬아슬하게 구해낸 애국 의인이 바로 오희길이다. 저서로는 『도암선생문집(鞱庵先生文集)』, 『도동연원(道東淵源)』 등이 있다.
10. 황윤석[1729~1791]
본관은 평해로 호남 실학의 거두이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서 만은(晩隱) 황전(黃廛)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자는 영수(永受), 호는 이재(頤齋)이다. 목천과 전의 현감을 지낸 그는 서구의 신지식과 조화를 시도한 석학으로 유명한 선비이다. 그는 『이재난고(頤齋亂藁)』, 『이재속고(頤齋續藁)』, 『이수신편(理數新編)』, 『자지록(姿知錄)』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1. 송태회[1872~1940]
자는 평숙(平叔)이고, 호는 염재(念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어려서부터 서당에 나가 공부를 하였는데, 특히 글씨를 잘 썼다. 1887년(고종 24) 16세 때 동몽진사가 되었으며, 1900년(고종 37)에 박사 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문학으로 이름을 높였다. 시를 지으면 언제나 장원하였으며 성균관에서 상소문을 도맡아 작성하였으며 선전에 8회나 입선을 함으로, 호남선비들은 그를 두고 시·서·화 삼절이라 칭하였다. 그의 유고는 미간인 채로 종손이 외지에서 소장하고 있어 다 살필 수 없으나 시집의 처음 장에 실린 「모양세시사(牟揚歲時詞)」가 전해 온다.
1908년 37세 때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했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시골로 내려와 보성, 순천, 능주 등지에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8년 고창군 부안면 오산보통학교에 재직했다. 1922년 당시 교장인 양태승과 함께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여 남한에 유일한 민족학교인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 역사·한문·서화 등을 지도했다. 1940년 고창읍 교촌리에서 세상을 떠나니 고창고보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염제문집』이 유고로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