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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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영어음역 | Geumnyeong Gimssi |
영어의미역 | Geumnyeong Gim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집필자 | 이기화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세웅을 입향시조로 하는 전라북도 고창군의 세거 성씨.
[연원]
김알지(金閼智)의 39대손 김시흥(金時興)이 고려시대에 공을 세워 김녕군(金寧君)으로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하여 김수로왕계를 섬기고 김시흥계를 후김(後金)으로 여겨 오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혼돈이 초래되어 조선 현종 대에 이르러 시조는 달리하면서 본관은 같이하게 되었다.
[입향경위]
조선 개국공신 익화군의 7대손인 김세웅(金世雄)[1569~?]이 임진왜란을 피해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묵점(墨店)에 은거하였다가 성송면 사내리 포동(蒲洞)에 정착하였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전사하자 아들 김동호(金東浩)가 포동에 장사 지냈다. 1637년(인조 15) 김대열(金大烈)이 무장 땅 선비들의 초청으로 왕산(旺山) 아래 의숙을 차려 후학들을 훈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무장면 신촌리에 정착하였다.
김녕김씨 중조인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가 박팽년(朴彭年)과 단종 복위 모의를 하던 중 붙잡혀 순절한 뒤 김문기의 가족들이 전라도 지역에 은거하였고, 충의공의 7대손인 김진휘(金珍輝)[1531~?]가 더 깊은 곳을 찾아 해리면 고성리에 정착하였다. 김문기의 13대손 김호성(金濠聲)[1816~1870]이 고수면 부곡리 연동(蓮洞)에 사는 아내를 맞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곳에 정착하였다. 충정공의 13대손 김상의(金相儀)가 충의공의 역모 사건 뒷마무리가 개운치 않아 심원면 화산(花山) 깊숙한 계곡에 정착하였다.
[현황]
2009년 현재 김세웅의 후손들이 성송면 사내리 포동에 12대째, 김대열의 후손들이 무장면 신촌리에 14대째, 김진휘의 후손들이 해리면 고성리와 무장면 송현리에 10대째, 김호성의 후손들이 고수면 부곡리에 7대째, 김상의의 후손들이 심원면 화산에 7대째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군내(郡內)에 291가구에 776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