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48 |
---|---|
한자 | 高山城 |
영어음역 | Gosanseong |
영어의미역 | Gosanseong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성송면 무송리|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강원종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상금리와 성송면 무송리,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 생촌리와 경계를 이루는 백제 시대 석성.
[개설]
고창군 대산면과 성송면 일원은 백제 시대 송미지현[현 성송면, 대산면, 무장면 일원]에 속하다가 무송현으로 개칭되었고, 1417년(태종 17) 무송현이 장사현과 병합하면서 무장현이 되었다. 고산성에 대한 문헌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무장 고적조에 “고상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8천 1백 척이고, 가운데에 세 샘물이 있다 [高山城石築周八千一百尺中有三泉].”이라 기록되어 있고, 『대동지지(大東地志)』12 무장조에 “고산성은 남쪽으로 20리에 있고, 둘레는 8천 1백 척이고 샘물이 3개 있다[高山城南二十里周八千一百尺泉三].”라고 쓰여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 여지고 성곽 3에서는 “고산성은 남쪽 20리에 있고 돌로 쌓았고 둘레가 8천 1백 척이고, 지금은 폐지된 3개의 샘물이 있다[高山城在南二十里石築周八千一百尺今廢內有井三].”이라 하였고, 『무장읍지(茂長邑誌)』(1958) 성곽조에는 “고산성은 고산에 있고 돌로 만들었으며, 둘레는 8천 1백 척이고 그 안에 두개의 샘이 있다[高山城在高山石築周圍八千一百尺內有二泉].”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기록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고산성의 축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문헌비고』 성곽조에 “전해오기에 삼국 시대 무송현 성이 남쪽 20리에 있고, 토성기지가 있다.[世傳三國時城茂松古縣城在南二十里有土城基址].”라 하여 무송현은 삼국 시대의 치소성으로 전해지고 있다.
[건립경위]
고산성은 무송현 치소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3㎞ 정도 떨어진 고산에 있다. 이는 평지성과 인근의 산성을 구축하여 산성을 피난성으로 활용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위치]
고산성은 호남정맥의 줄기를 이루는 높이 528m의 고산에 있는데, 고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쪽 구릉을 따라 성벽 통과선이 둘러져 있다. 이곳은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과 고창군 대산면을 지나 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과 경계를 이룬다. 고산성 북쪽으로는 성송면에서 장성 방향으로 지방도 893호선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암치치가 있고, 남쪽으로는 대산면에서 장성 방향으로 가미치가 있다.
[형태]
고산성은 고산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북과 서남 방향으로 흐르는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있으며, 서쪽 방향으로는 계곡이 흐르고 있다. 성의 둘레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8,100척인데, 영조척[30.8㎝]으로 환산하면 2,490m이고, 포백척(布帛尺)[46.66㎝]으로 환산하면 3,780m이다. 현재까지 정확한 실측 자료는 없으나 성의 둘레는 4㎞~5㎞ 정도로 알려져 있다.
고산성은 지형에 따라 석축을 하거나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계곡과 봉우리가 포함된 포곡식 산성이다. 석축 성벽의 경우 산 경사면을 ‘ㄴ’자로 깎아낸 후 바깥쪽에만 석축을 하였고, 안쪽의 뒷채움은 흙과 잡석을 다져넣었다. 바깥쪽의 성돌은 아래서 위로 올라가면서 물려쌓기를 하였다. 성문은 북문과 남문의 형태가 남아 있으나, 동문과 서문은 찾아볼 수 없다.
[현황]
고산성은 고창 지역에서 규모가 큰 편인데, 성벽의 대부분은 무너져 있고, 약 600m 정도의 성벽만이 남아 있다.
[의의와 평가]
고산성은 호남정맥의동과 서를 잇는 고갯마루가 남쪽과 북쪽에 있는데, 이곳의 교통로를 감시하기에 유리한 곳에 축성되어 있다. 호남정맥의 이동 지역은 영산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루트이기에 고산성은 이 길목을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