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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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倉洞里- |
이칭/별칭 | 창동리 미라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류정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3년 1월 - 창동리 미이라 발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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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43년 2월 2일 - 창동리 미이라를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이마무라 해부학 교실로 운반 |
발생|시작 장소 | 창동리 미이라 발견 -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1-5 |
성격 | 미이라 발견 사건 |
[정의]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창동에서 발견된 미이라.
[경과]
창동리 미이라 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발견된 미이라로서 1943년 1월 말 조선 대화 방적 회사(朝鮮大和紡績會社)가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241-5번지에 연고가 없는 묘지를 정리하던 중 발견하였다. 창동리 미이라는 신장이 182.6㎝가량 되는 큰 키에 성별은 남성이었다. 오른발이 다소 형체가 변한 것을 제외하면 부패한 곳이 없고 머리카락과 수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결과]
조선 대화 방적 회사는 이 미이라를 경성 제국 대학 의학부 이마무라[今村] 해부학 교실에 기증하여 1943년 2월 2일 운반하였다. 경성 제국 대학으로서는 이 미이라가 세 번째 미이라였는데, 첫 번째는 1921년 9월 12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의 공동 묘지에서 발견된 여자 미이라였고, 두 번째는 1940년 8월 16일 경성부 북아현정[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산 35번지에서 발굴된 남자 미이라였다. 세 미이라 중 창동리 미이라가 신장도 가장 크고, 부패 정도도 가장 덜했다고 한다.
당시 미이라를 조사하였던 이마무라 해부학 교실의 조수 히라노[平野伍吉]의 인터뷰에 따르면, 조선은 비가 적고 토지가 건조하여 미이라가 나올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 미이라의 출처와 연대를 정확히 밝히지는 못하였으나 대략 500~600년 전의 것으로 보았으며, 관의 모양을 통하여 상당한 양가(良家)의 무덤이라고 밝혔다. 또한 무덤은 부부 합장 형태였고, 부인으로 추정되는 유골도 발견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