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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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壽堂里咸平鄭氏世居地 |
영어공식명칭 | Ancestral Village of Hampyeong Jeong Clan in Sudang-ri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수당리에 있는 함평 정씨 세거지.
[개설]
함평정씨는 수당리에 낙향한 지 450년 정도 된다. 현재 수당리 주민 100여 가구 중 60여 호가 함평정씨일 정도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대표 인물은 대한 제국 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대학자였던 정재학과 1919년 수당리 봉화 시위를 이끌었던 정원환을 꼽을 수 있다.
[명칭 유래]
수당리는 원래 해미군 일도면(一道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수동(壽洞)과 안국동(安國洞) 일부를 병합하여 이루어졌다. 그리고 동리 명을 수동과 안국동에서 한 자씩 따서 수국리(壽國里)라 하고 서산군 정미면에 소속되었는데, 1917년에 원당(元堂)에서 다시 한 자씩 따서 수당리(壽堂里)로 고쳤다.
[형성 및 변천]
함평정씨의 본원이 신라 사로 6촌의 부족장인 지백호(智佰虎)이고, 지백호의 38세손 정언겸(鄭彦謙)에 이르러 전라남도 함평으로 퇴거 은둔하였는데, 그 시기는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던 1126년(인종 4)이다. 그 후 후손들이 이곳을 본관으로 삼아 함평정씨 문중을 이루어 오고 있다.
함평정씨 문중은 크게 4파로 나뉘었는데, 시조 정언겸의 11세손인 정계륜(鄭繼倫)의 후손을 진사공파(進士公派)라 하고, 정언겸의 11세손 정숙륜(鄭叔倫)의 후손을 승지공파(承旨公派), 정숙륜의 차남 정효창(鄭孝昌)을 후손들로 이들을 면천공파(沔川公派), 정숙륜의 3남 정무창(鄭武昌)의 후손을 주부공파(主簿公派)라 한다. 이 중에서 수당리로 낙향한 파는 면천공파이다.
수당리에 거주하는 함평 정씨를 면천공파라고 하는 것은 정효창이 면천 군수로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효창은 이곳에서 거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수당리의 정씨 문중에서 정효창의 5세손인 정암(鄭巖)을 수당리 함평정씨의 파조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함평정씨 족보에 의하면, 정암과 그의 아들 3형제부터 본격적으로 수당리에 거주하였고, 지금까지 15대를 계승해 오고 있다. 정암의 첫째 아들은 정흥종(鄭興宗)인데 후손들을 '종손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대부분 수당리의 ‘윗숫골’에 거주하고 있다. 둘째 아들은 정흥선(鄭興先)인데, 그의 후손들은 '차종손파'라고 하는데 '아랫 숫골', '원당골' 등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을 중간말에 산다고 하여 '중간말파'라고도 부른다. 셋째 아들은 정흥후(鄭興後)인데, 그의 자손들은 '막내파'라고 부른다. 이들은 '원당골'과 정미면 대운산리에 거주하고 있다.
[관련 인물]
문중에서 자랑하는 인물은 정재학과 정원환이다. 정재학(鄭在學)[1888~1949]의 자는 도명(道明)이고 호는 방재(方齋)다. 정재학은 서산 안국산 아래 원당리에서 태어났다. 15세인 1902년에 백형 정재화(鄭在華)와 함께 존재(存齋) 유진하(兪鎭河)를 찾아가 수학하였다. 1906년에는 춘천으로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1842~1915]을 찾아가 만났다. 1907년 유인석이 만주로 건너가는 길을 동행하다 해서(海西)에서 돌아가라는 유인석의 권유에 따라 되돌아왔다. 이후 직암 이철승 등과 교유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문집에는 『방재집(方齋集)』이 있으며 70여 명의 문하생이 있다.
정원환(鄭元煥)[1864~1939]은 자가 호연(浩然)이고 호는 죽사(竹史)이다. 정원환은 1919년 수당리의 봉화 시위를 주도한 인물이다. 대호지·정미 4·4 독립 만세 운동이 4월 4일, 정미면 천의 장터에서 발발하였다. 직후인 4월 8일, 정미면 수당리에서도 만세 운동이 발발하였다. 이곳에서는 300여 명의 주민이 참가하였는데, 야간에 마을 뒷산인 봉화산[안국산] 봉수대에 올라 봉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군경의 기록에 의하면 경관 4명과 보병 2명이 급파되어 발포하였는데, 사망자가 1명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사망자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시위대를 이끌었던 정원환은 시위 직후 일제 군경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가 석방되었다. 그리고 고문의 여독으로 많은 고생 끝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자연환경]
수당리는 봉화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북쪽으로는 봉화산 너머 정미면 매방리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봉화산의 능선이 가로막혀 있는데 정미면 봉성리가 산 너머에 있다. 북쪽으로 정미면 매방리와 접하고 있다. 그리고 동남쪽으로 탁 트였는데 평야 지대가 형성되어 있고, 서산시 운산면으로 이어진다.
[현황]
오늘날 수당리는 100여 가구 중 약 60%인 60여 호가 함평정씨 문중이다. 여타 성씨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많이 섞여 살고 있으나 정씨 문중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전체 150여 호 중에서 무려 80%인 120여 호가 정씨 문중이었다고 한다.
수당리 함평정씨 문중에서는 한학자 정재학의 학문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들은 제사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1,653㎡ 정도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토지 임대료로 제사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 제를 올리는 날은 음력 3월 15일이다. 그때가 되면 산이 많은 수당리는 온통 진달래로 붉게 물든다. 주민들은 제주를 마시고 흥을 내어 시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