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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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沔川朴氏 |
영어공식명칭 | Myeoncheon Baksi|Myeoncheon Ba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남석 |
본관 | 면천 -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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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 면천대 -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 |
성씨 시조 | 박술희 |
[정의]
박술희를 중시조로 하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면천박씨(沔川朴氏)는 박혁거세의 후손인 박술희(朴述希)[?~945]를 중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박술희는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태사 삼중대광(太師三重大匡)에 추증되고 면천군(沔川君)에 봉해졌다. 이 때문에 후손들은 박술희를 중시조로 삼고 본관을 면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면천 박씨는 면천 복씨와 더불어 면천을 본관으로 삼은 대표적인 성씨다.
[연원]
박술희는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당시 혜성군(槥城郡)] 출신으로 18세에 궁예(弓裔)의 호위병이었으나 후일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섬겼다. 박술희는 여러 번 공을 세워 벼슬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태조 왕건이 921년(태조 4) 장화 왕후(莊和王后)의 소생인 장남 왕무(王武)를 태자로 세우려 하는 것을 도와 고려 2대 왕인 혜종이 되도록 하였다.
태조 왕건이 943년(태조 26) 죽음을 앞두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건네며 태자의 보필을 부탁하자, 박술희는 끝까지 유명(遺命)을 지켰다. 혜종이 병들자 왕규(王規)가 역모를 꾀하려 하여 박술희는 군사를 이끌고 왕규를 내쫓았다. 이때 정종은 도리어 박술희가 딴 뜻이 있어 군사를 거느렸다고 의심하여 박술희를 갑곶[江華島]으로 귀양 보냈다. 이에 왕규는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박술희를 시해하였다. 나중에 박술희의 죽음이 왕규의 모략이었음이 밝혀져 모든 관직은 회복되었고 엄의(嚴毅)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혜종(惠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면천박씨 문중은 고려에 대한 충절을 강조해 조선 시대에는 출사한 인물이 많지 않다. 조선 시대 두각을 드러낸 인물로는 박삼길(朴三吉)[1442~1509]이 있다. 박삼길은 성종 때의 문신으로,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연산군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연산군의 폭정이 거듭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또한 율곡 이이(李珥)의 문인으로 저명한 학자였던 박여룡(朴汝龍)이 있다. 박여룡은 1573년(선조 6)에 중사마(中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고, 1581년(선조 14)에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호조 좌랑을 거쳐 공조 정랑에 이르러 스승의 유집을 간행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워 이조 판서에 추증되고 문온(文溫)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해주의 방현 서원(傍賢書院)에 제향되었다.
[현황]
면천박씨의 집성촌은 황해도 해주와 경기도 옹진군,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일원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본관지인 당진시 면천면에는 세거지를 이루지 못하고 10여 호 남짓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관련 유적]
1970년 5월 10일에 창립된 면천박씨 대종회는 중시조인 면천군 박술희를 배향하는 ‘면천대(沔川臺)’를 경기도 의정부시 민락동에 조성하여 매년 4월 마지막 일요일과 음력 9월 16일 기일(忌日)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박술희의 20세손인 박삼길의 묘와 묘비는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수정리 산8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