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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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安訥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Yi Annu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71년 - 이안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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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37년 - 이안눌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12년 - 이안눌 신도비 건립 |
현 소재지 | 이안눌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산24-3 |
원소재지 | 이안눌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산24-3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이안눌(李安訥) |
재질 | 화강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38.5㎝×98.5㎝×38.3㎝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안눌의 신도비.
[개설]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이다.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자다. 아버지 진사공 이형(李炯)과 어머니 경주 이씨의 셋째 아들로 서울 서리(西里)에서 태어났다.
이안눌은 1599년(선조 32) 정시(庭試)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601년 예조와 이조의 정랑을 지냈다. 그해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었다. 1607년 동래 부사, 1610년 담양 부사, 1613년 경주 부윤, 1615년 숭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한 후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였다. 1617년 예조 참의, 다음해 강화 부윤, 1622년에 부사과(副司果)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이안눌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용되어 예조 참판에 올랐으나 이듬해 이괄의 난을 방관했다는 3사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1628년(인조 6) 방면되어 강화부 유수에 복직, 형조 참판을 거쳐 1631년(인조 9)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안눌은 1941년에 주청 부사(奏請副使)로 명나라에 가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존(追尊)을 허락받아 원종(元宗)이란 시호를 받고 귀국한 공으로 예조 판서에 승진하였다. 1633년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듬해 공청도(公淸道)[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이안눌은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1637년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안눌은 사후에 청백리에 녹선되고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현종은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집으로는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건립 경위]
신도비는 이안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712년(숙종 38)에 세웠다. 비문은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金壽恒)[1629~1689]이 두전(頭篆)[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을 썼다.
[위치]
이안눌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산24-3 ‘비석말’ 마을에 있다. 이안눌의 묘소는 신도비에서 북쪽으로 약 300m 지점의 야산에 있다. 묘소 앞에는 묘비(墓碑)가 있다.
[형태]
이안눌 신도비는 네모반듯한 대좌에 화강석의 비신(碑身)[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세우고 옥개형 이수(螭首)[비석의 머리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를 올렸다. 높이는 238.5㎝, 폭 98.5㎝, 두께 38.3㎝이다. 신도비는 철책으로 보호되어 있다.
[금석문]
이안눌 신도비 두전에는 ‘증좌찬성 시문혜공 동악 이 선생 신도비명(贈左贊成諡文惠公東岳李先生神道碑銘)’이라고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