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0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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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揷橋川 |
영어공식명칭 | Sapgyochen Stream |
이칭/별칭 | 버그내,버그네,범천,범근천,신교천,사읍교천,삽교호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합덕읍 신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추윤 |
전구간 | 삽교천 -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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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 소재지 | 삽교천 -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운정리 |
성격 | 하천 |
면적 | 1,649.4㎢ |
길이 | 58.6㎞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의 동쪽 끝 아산시와의 시, 군 경계를 흘러가는 충청남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하천인 국가 하천.
[개설]
삽교천은 유로 연장 58.6㎞, 유역 면적이 1,649.4㎢인 국가 하천이다. 버그내, 범근천, 범근내, 사읍교천, 신교천, 금마천 등의 이칭으로도 불린다.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신풍리 상풍 마을 신풍 저수지 윗쪽 기러기재[345m] 부근에서 발원하여 장곡천(長谷川)이 되고, 금마면을 거치면서 금마천(金馬川)이 되고, 여러 지천들을 합류하여 북쪽으로 계속 흘러가면서 예산군 삽교읍에 이르러서 삽교천(揷橋川)이 된다.
삽교천 유역은 일찍부터 내포 지방이라 하여 하나의 지역 문화권을 형성해 왔다. 내포 문화권의 교류는 주로 삽교천과 아산만을 통하여 경강을 무대로 하여 이루어졌다. 삽교천 유역은 당진을 비롯하여, 천안, 아산, 예산, 홍성, 청양 등 3개 시 4개 군에 걸쳐 있다.
삽교천 하구는 익곡형(溺谷形)[지반의 침강이나 해면의 상승으로 육지에 바닷물이 침입하여 해안에 생긴 골짜기]으로서 후빙기의 해수면 상승에 의한 침수 가능 지역으로 내륙 쪽으로 깊숙이 넓게 전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삽교천의 중하류는 기복이 극히 작은 관계로 오늘날도 그렇지만 후빙기의 해면 상승 직후에는 대단히 넓고 깊숙한 만입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에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큰 이 지역은 간조 시에 조류에 의하여 하천의 운반 물질이 대부분 바다로 밀려갔다가 만조 시에 조류에 의하여 그 일부가 다시 하구 쪽으로 운반되어 와서 퇴적됨으로써 간석지가 형성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간석지의 지면이 높아졌는데, 이 높아진 곳을 주민들이 간척하여 경지로 만들었다.
삽교천에는 예산군 덕산면 구만리(九萬里) 포구까지, 무한천은 예산읍 창소리(倉所里) 포구까지 조석(潮汐)이 미쳤다. 따라서 이곳까지 배들이 다녔으며, 구만포가 삽교천의 가항 종점이었다. 구만포는 대원군 부친 남연군 무덤 도굴 사건으로 유명한 오페르트 사건 시 그레타호의 최종 상륙 지점으로 유명한 포구이다.
[명칭 유래]
조선 시대 하천 이름은 ‘범근내’, ‘버그내’였다. '다음 가는', '다음이 되는', '버근', '버금' 단어에, '내'라는 ‘하천’을 뜻하는 단어가 붙어서 된 합성어인 ‘버근내’가 동음 음운 탈락 현상에 의해서 ‘버그내’가 되었다. 아산만에서 안성천이 제일 큰 하천이고, 두 번째로 큰 하천이어서 버그내라고 불린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삽교천으로 불렸다. 삽교천은 섭다리가 음운 변천으로 삽다리가 되고 삽다리 한자 표기 시 ‘삽교(揷橋)’로 되었다는 설과 삽내에 다리가 놓이므로 삽내를 한자로 표시한 삽천(揷川)과, 다리를 한자로 표시한 교(橋) 자가 붙어서 삽천교(揷川橋)가 되고, 이것이 줄어서 삽교(揷橋)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삽'은 백제어로' 붉은 색상'이란 뜻으로 삽내가 홍수질 때 붉은 탁류가 되어서 범람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내'는 시내보다 크고 강보다 작은 물줄기를 말한다.
[자연환경]
내포 지방의 젖줄로 불리는 삽교천은 조선 시대 이래 예당평야의 수원지 역할을 해 왔으며, 내포 지방의 심장인 가야산과 함께 내포의 상징이다. 아산만에 유입되는 삽교천은 중하류에 대평야를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이 해안의 간석지를 간척하여 만든 해성 퇴적 평야(海成堆積平野)이다.
삽교천 유역의 암석은 상류로부터 편암과 화강 편마암, 화강암, 편마암과 편암 순으로 바닷가 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화강암 심층풍화대는 넓고 낮은 저지대를 이루고, 편마암 심층 풍화대는 구릉 지대를 이루고 있다. 삽교천 유역의 저습지는 화강암 심층 풍화대로 수평, 수직 풍화가 진전되고 제거되는 속도가 빨랐던 곳이다. 그리하여 후빙기 해면 상승에는 넓은 와지(窪地)[움푹 패어 웅덩이가 된 땅]의 모습이 되었고, 현 해수면 이하의 고도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후빙기 해수면 상승에 의해서 해침을 받게 되면서 삽교천 유역의 저습지는 커다란 만의 형태로 변화되었다. 이후 만으로 변한 저습지에는 갯벌이 쌓였다. 후빙기 갯벌의 성장에 의하여 저습지는 평평하게 메워졌으며 해수면은 상대적으로 약간 하강하였다. 육지화되어 가는 저습지에는 하천이 범람하기 시작하였으며, 범람은 주로 불어난 하천물이 만조와 겹치는 지점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지형의 변화]
삽교천 방조제가 건설되기 직전까지 저습지로의 범람이 계속되어 홍수가 일어났고 갯벌의 성장도 하도를 따라서 계속 이루어졌다. 아산만으로 유입되는 삽교천은 방조제가 건설되기 전에는 조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감조 하천이었다. 그러나 하천에 제방이 쌓이고 방조제가 건설되고 직강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하천 지형에 변화가 일어났다. 하천을 따라 제방이 쌓이면서 주변으로 퍼지지 못한 갯벌이 제방 내에 쌓이게 되었다. 방조제 건설로 조류에 따라 내륙으로 공급되던 갯벌은 차단되고, 조수가 사라진 하천은 하도를 따라 침식력이 강해졌다. 한편 직강 공사로 인하여 하천은 직선화되었지만 유로는 다시 곡류하고 있다. 이는 침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에 따라 제방 내의 갯벌은 단구(段丘)[하안(河岸)과 해안 또는 호안(湖岸)을 따라 형성된 계단 모양의 지형]화되어 갔으며, 이와 함께 유량이 증가할 때마다 제방 내부의 단구면은 높아지면서 제방 단구가 만들어졌다.
간척은 조선 시대에 이미 상당한 정도로 이루어졌고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저습지를 대상으로 주로 하천 정비 공사가 이루어졌다. 1954년부터 유엔한국재건단(UNKAR)이 창설됨을 계기로 연차적으로 개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간척은 16세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하포, 중포, 상포 등 작은 만을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점차 17세기 박원, 공포, 신원을 거쳐서 18세기에 이르면 수문동, 가판까지 확대되고 20세기 들어와서는 삽교천 연변 제방까지 농경지로 개답되었다. 배가 들어오는 부리포 갯골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간석지성 충적지 내에서는 터돋움한 촌락이나 도로 등을 제외하고는 고도 차이가 적다. 개발된 간석지 중에서 갯골은 사라졌으나 일부는 수로로 개수되어 과거 갯골 형태의 시원을 찾을 수 있다. 큰 갯골의 형태가 아직도 남아있는 곳의 끝에 1970년대 초까지 인천까지 증기선이 드나들던 부리포의 흔적이 현재도 남아 있다.
삽교천, 무한천 지역은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차령산맥의 일부가 남동부를 지나는 장년기 내지 노년기 지형이 펼쳐진다. 본 유역의 지질은 시생대의 편마암계 암석과 중생대 쥬라기의 대보 화강암으로 이루어졌다. 편마암계 암석은 유역의 남동부에 소규모로, 대보 화강암은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삽교천은 서부 산지와 중앙 구릉지 사이의 골짜기를 흐르다가 삽교읍 부근에서 신암, 오가면 구릉지와 평행하게 북동류하면서 합덕-우강 지역에 오면 심하게 곡류 변화를 한다. 삽교천에서 하천의 유로 변경이 가장 심한 곳은 무한천과 삽교천이 만나는 지점이다.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는 원래 삽교천 동쪽 신암 쪽에 붙어 있었으니 유로 변동에 의하여 현재는 반대쪽인 서쪽 당진시 합덕읍 옥금리 옆에 붙어 있다. 삽교천 주변의 자연 제방 발달은 미약하다. 구만리까지 조류의 영향이 미쳐서 상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쉽게 하천 양안에 퇴적하지 못하고 바다로 유출되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삽교천의 구만리 상류부는 ‘질땅’, 구만리에서 구양도에 이르는 충적지는 질땅과 갯땅이 섞인 ‘보래땅’, 소들강문은 ‘갯땅’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삽교천 변에는 간석지성 충적지가 넓게 분포한다. 조수 간만의 차가 약 9m에 달하여 밀물이 들어올 때 만이 협소하고 길어 이상 고조 현상이 일어나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삽교천이 운반한 토사가 다시 조류에 밀려와서 간석지성 해안 충적 지형을 형성하는 한편,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간척되어 넓은 답작 지대가 형성되었다. 삽교천 중류와 하류 주변으로는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는 저습지가 나타나며 이 일대를 예당평야라 부른다. 예당평야는 하류로 가면서 규모가 커지는데 대부분이 10m 이내의 고도 분포를 이루고 간석지를 간척하여 만든 해성 퇴적 평야가 대부분이다. 서해안과 접해 있는 평야이기에 고도가 낮으며 상대적으로 심층 풍화를 받은 기반암이 개석되어 나간 저지대에 퇴적물이 쌓여서 형성된 모습이다.
[삽교천의 본류와 지류]
삽교천은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 부근에서 무한천(無限川)과 만나서 계속 북류하여 아산시 인주면 대음리에서 곡교천(曲橋川)을 다시 만나 아산만의 삽교호에 유입된다. 삽교천 본류에는 주요 지천인 곡교천, 무한천 이외에도 도고천, 남원천, 덕산천, 화양천, 신양천 등 많은 지천들이 유입된다.
삽교천을 두고 옛날에는 상류 지역인 홍주 지역에서는 금마천(金馬川), 중류 지역인 예산 지역에서는 신교천(薪橋川), 덕산에서는 선화천(宣花川), 사읍교천(沙邑橋川), 최하류인 면천[현 당진시 우강면 일대]에서는 범천(犯川), 범근천(犯斤川), 버그내 등으로 불렀다. 하나의 하천을 두고 상류에서 하류까지 지역에 따라서 하천 지명이 다르게 불리는 것은 다른 하천에서도 흔한 현상이다.
삽교천 변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 유명한 회해포(懷海浦), 풍해포(豊海浦), 범근내포(犯斤乃浦)를 비롯하여, 유궁진(由宮津), 장포(獐浦), 강문포(江門浦), 호두포(狐頭浦), 구만포(九萬浦), 돈곶포(頓串浦) 등 많은 포구들이 있어서 주변에 장시(場市)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내포 지방 교통의 허리 역할을 했으며 문화 통로의 창 역할을 하였다.
삽교천은 금마천, 효교천, 석우천, 남원천, 무한천, 곡교천 등 많은 지류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에는 ‘사읍교천(沙邑橋川)’이라 불렸다. 또 고려 시대에는 ‘신교천(新橋川)’이라 불리기도 했다. 삽교천은 중상류에 하천이 뱀 모양으로 사행하여 구부러져 흐르는 자유 곡류 하천(自由曲流河川)으로 유명한데, 옛날에는 하천 연변에 많은 나루가 있었다.
또, 삽교천 연변인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江門里) 일대는 조선 시대에 범근내포라는 큰 포구가 있고, 그 인접지에 공세 창고가 있어 공주, 홍주목[현 홍성]에서 관할하던 세곡미를 쌓아 두었다가 한양 마포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그리고 이중환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 나오는 큰 나루인 유궁진(由宮津)도 있어서 서울을 오가는 내포 지역의 상인이나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후에 삽교천이 곡교천과 만나는 곳에 위치한 범근내포가 바닷물의 역류와 토사의 퇴적으로 하상이 높아져 더 이상 조운선이 정박할 수 없게 되자, 인접한 아산시 인주면 공세곶창으로 1478년(성종 9)에 이전했다.
[현황]
삽교천은 하류 일대에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여 예당평야를 형성하고 있는 자유 곡류 하천이었다. 하류 쪽으로 내려오면서 하방 침식이 한계점에 이르러서 하천의 유로 변동을 가져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행천을 이루었다. 현재는 홍수 방지를 위해서 1980년대부터 진행된 하천 직강화 공사로 인하여 인공 제방이 설치되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