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0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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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內浦平野 |
영어공식명칭 | Naepo Pyeongya Plain |
이칭/별칭 | 예당평야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추윤 |
전구간 | 내포평야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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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 소재지 | 내포평야 - 충청남도 당진시 신평면 |
성격 | 평야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의 삽교천 이서(以西) 지역과 차령산맥 이북의 평야.
[개설]
내포평야는 차령산맥 이북의 삽교천[범근내포] 이서(以西) 지역의 평야로 일반적으로는 예당평야를 지칭하기도 한다. 건설부 산하 국립 지리원에서 나온 『한국지지』에는 내포평야를 삽교천 이서의 평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충청남도의 평야를 설명하면서 "차령 이북의 평야는 이른바 내포평야로 불리는 삽교천 이서의 평야와 야산 구릉으로 이루어지며 안성천 이북 평택 평야와 연결된다. 차령산맥 이남의 평야는 충청 평야 혹은 논강 평야로 일컬어지는 지역으로 금강 남쪽의 호남평야와 이어진다."라고 기술하여 삽교천 유역의 내포평야와 금강 유역의 충남평야를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명칭 유래]
현재 각종 서적에는 내포평야가 금강 상류의 충남평야를 지칭한다는 오류가 많다. 이것은 최초로 오류를 범한 일본인 야구보흥(野口保興)의 『제국대지도(帝國大地圖)』 조선 편에서 "금강을 일명 진강이라 하는데 내포 지방에 많은 수운 편을 준다."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식민지 사관에 의해서 금강 중류가 내포평야, 하류가 전북평야, 금강 상류는 충청남도에 속하여 전북평야라 부르지 않고 내포평야라고 불러 왔다.
[자연환경]
조선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를 살펴보면 "충청도에서 내포를 최상의 지역으로 삼는다. 공주에서 북쪽으로 200리 되는 곳에 가야산이 있고 서쪽은 큰 바다이고…… 동쪽은 큰 들이며 들 가운데 큰 포구가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유궁진(由宮津)이다. 밀물이 들어와 차지 않으면 배를 띄울 수 없다. 남쪽은 오서산(烏棲山)이 간격을 두고 있는데 가야산(伽倻山)에서 따라온 줄기다. 오서산 동남쪽을 통하여 공주와 통한다. 가야산 앞과 뒤쪽에는 10개의 고을이 있는데 이것을 함께 내포(內浦)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내포’라는 뜻은 일반 명사가 아닌 삽교천 이서 지역을 의미하는 지역명임을 알 수 있다.
[내포평야에 대한 기록]
『택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내포 지역은 조선 시대 가야산 전후의 10개 군현인 당진, 면천, 덕산, 서산, 해미, 태안, 결성, 홍주, 대흥, 보령임을 알 수 있다. 노도양 박사는 ‘내포평야고’에서 면천을 빼고 청양을 포함시켰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 당시 즉 조선 시대 고지도에는 예산, 정산, 청양, 신창, 아산 등은 삽교천 이동 지역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임선빈 박사[충남 발전 연구원]는 『내포 천주교사의 의의』에서 내포 지역을 위에 든 고을에서 대흥과 보령을 빼고 신창과 예산을 삽입하여 10개 고을이라고 하였다.
최영준 교수는 「19세기 내포 지방의 천주교 확산」이란 논문에서 아산, 온양, 신창, 예산, 대흥, 면천, 당진, 덕산, 해미, 홍주의 10개 고을을 내포 지방으로 비정했다. 즉, 삽교천의 동쪽과 서쪽에서 5개 고을씩 선정하였다. 서산, 태안, 보령 등이 빠지고 대흥이 들어갔다.
「조선 천주 교구」(1861)에서는 아산, 온양, 신창, 예산, 대흥, 면천, 당진, 덕산, 해미, 홍성을 상부 내포, 태안, 서산, 결성, 보령, 청양, 남포, 비인, 서천, 한산, 홍산을 하부 내포라고 불렀다. 1861년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베르뉘 주교가 조선 교구를 8개 본당 구역으로 나누면서 홍주 이북을 상부 내포, 홍주 이남과 태안반도 일대를 하부 내포라고 구분했는데, 이것은 지리적 개념보다는 종교의 확산에 따라서 구역 편의상 붙인 것으로 추측된다.
남사고의 『십승기(十勝記)』에 의하면, "유구와 마곡의 두 강물 사이가 병란을 피하는 곳이다. 서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으면 곧 내포(內浦)이다. 내포 바닷가 주민들은 생선과 소금을 가지고 유구의 목화와 바꾼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내포 지역은 예산과 유구 사이에 있는 차동 고개 너머 바닷가 지역이지 공주 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경준의 『사연고(四沿考)』 면천 조에 의하면, "오서산 이북 예산, 신창, 면천, 덕산에서 여러 갈래의 하천이 흘러들어 융진포로 흐른다. 세속에서 융진포를 돈곶포라 부른다. 내포 사람들이 대부분 이 호(湖)를 건널 까닭으로 왕래한다. 오른쪽의 많은 읍들이 포위하여 위쪽과 아래쪽에 존재한다. 연안의 서쪽을 내포(內浦)라 한다."라고 하였다. 즉 내포 지역이 삽교천 연안의 서쪽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김정호가 제작한 『동여도(東輿圖)』 충청도 편과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에도 현 삽교천의 최하류 신평면, 우강면 일대에 '내포(內浦)'라는 지명이 지도 위에 나온다. 대한제국 시대에 발행된 『대한지리』의 삽지도에도 내포가 위에 말한 지명에 표시되어 있다.
1948년에 간행된 최남선의 『조선상식』 지리 편에도 내포 지방을 삽교천 이서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즉, "포라 함은 아산만에 주입하는 삽교천, 금마천의 서쪽 여러 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금마천은 삽교천 본류를 말한다. 이 밖에도 원효 대사는 저서 『원효결』에서 "가야산의 모습이 너무나 수려하고 물기운이 뛰어나 나라 땅의 내장 부분과 같다 하여 내포라고 불렀다."라고 했다.
[현황]
여기서 의문이 되는 호(湖)는 용산호, 아산호와 같이 호수가 아니라 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내포 사람들이 이 호를 건너 신창과 평택을 왕래하고 한양으로 갔다.
당시 당진과 면천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3코스가 있었다. 첫째는 면천, 당진→홍주의 진두포[현 당진시 송악면 한진리 나루머리]→수원의 대진[현 평택시 포승면 만호리]으로 넓은 아산만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 있다. 둘째는 삽교천의 하류를 건너가는 길로 면천→아산의 우평포[현 당진시 우강면, 당시는 남원천 입구와 우평포 일대는 아산의 월경지였음]→아산의 대각포→공진→평택[당시 충청도에 속함]를 거쳐 가는 길이다. 셋째는 삽교천의 중류를 건너가는 길로 면천→돈곶포[덕산군 비방곶면, 월경지]→곡교천의 대포→공진→평택의 길이 있었다. 일단 돈곶포를 건너 신창→아산 요로원→평택으로 가는 지름길도 있었다. 또 돈곶포를 건너면 신창→온양→천안 혹은 전의 쪽으로 가는 길과도 연결된다. 위에 든 진두포(津頭浦), 우평포(牛坪浦), 돈곶포(頓串浦)의 나루 세 곳 중에서 돈곶포에서 건너는 것이 가장 안전하였다. 세 곳 중에서 바다를 건너는 거리가 가장 짧기 때문이다.
돈곶포는 현 지명으로 복원하면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돈포리 돈곶이[頓串] 마을로 '텐고지'라고도 부른다.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하평리와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그 당시 비방면 돈곶리는 삽교천을 사이에 두고 일부는 신암면 하평리에, 일부는 선장면 돈포리에 각각 편입되었다. 연암의 글에서도 『택리지』의 글과 같이 삽교천의 서쪽 지방을 내포라고 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