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6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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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王建 |
영어공식명칭 | Wang Geon |
이칭/별칭 | 태조(太祖),약천(若天),신성(神聖),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남북국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즉위한 고려의 초대 국왕.
[개설]
왕건(王建)[877~943]은 고려를 건국한 태조(太祖)이다. 신라 말 송악군[현 북한 황해북도 개성시] 일대의 유력 호족이었으나 아버지 왕융(王隆)과 함께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여 태봉(泰封)에서 시중을 역임하였다. 918년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 등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으며,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가계]
왕건의 본관은 개성(開城)이고, 자는 약천(若天)이다. 아버지는 세조(世祖) 왕융이고,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한씨(韓氏)이다. 호족 연합을 위한 혼인 정책으로 29명의 부인을 두어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 등 26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낳았다.
[활동 사항]
왕건은 877년(헌강왕 3) 1월 14일 송악에서 태어났다. 896년 궁예가 철원성을 도읍으로 삼아 건국하자 송악군의 사찬이었던 아버지 왕융과 함께 궁예에게 귀부하였다. 왕융은 궁예에게 삼한의 통일을 도모한다면 송악에 성을 쌓아 왕건을 성주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하였고, 궁예는 왕융의 제안대로 발어참성을 쌓아 왕건을 성주로 임명하였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의 각축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태봉의 세력 확장에 기여하였다. 900년에 광주·충주·청주와 당성군·괴양군을 평정하여 아찬이 제수되었고, 903년에는 수군을 거느리고 금성군을 함락시키는 큰 전공을 세워 알찬에 올랐다.
913년 왕건은 파진찬 겸 시중에 임명되어 도성으로 소환되었다. 변방에서 거둔 성과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하지만 높아진 정치적 위상만큼 국왕 궁예의 견제도 심해졌다. 914년 궁예는 모반죄를 운운하며 왕건을 시험하였고, 왕건은 최응(崔凝)의 기지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다.
궁예의 학정(虐政)이 절정에 치닫던 918년 왕건은 신숭겸·복지겸·배현경·홍유 등의 추대를 받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선포하였다. 이후 고려와 후백제의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920년 후백제의 공격을 받은 신라에서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후백제는 본격적으로 고려에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927년에는 고려와 후백제의 명운을 건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견훤(甄萱)이 신라의 수도까지 침투하여 경애왕을 살해하자 왕건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몸소 출전하였고, 공산(公山)에서 후백제군에게 포위당하여 장군 김낙(金樂)과 신숭겸을 비롯한 많은 군사를 잃고 간신히 목숨만을 건졌다.
공산 전투 이후 후백제에 밀리던 고려는 929년의 고창군 전투를 계기로 판세를 역전시켰다. 현지 호족들의 협조로 고창군에서 후백제군을 격퇴한 왕건은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로 세력을 크게 확장하였다. 935년에는 후백제의 내부 분열로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였고, 신라도 고려에 귀부하였다. 이듬해 견훤을 선봉에 세운 왕건은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굴복시킴으로써 후삼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후삼국 통일 후 왕건은 북진 정책을 표방하며 서경을 중시하였고, 938년에는 발해 멸망 후 귀순한 유민들을 수용하였다. 억울하게 노비가 된 백성을 풀어 주거나 세금을 감면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사성(賜姓)·혼인 정책 등을 통해 호족들을 하나로 묶어 국가의 기틀을 안정적으로 다진 것 또한 왕건의 중요한 업적이다.
[저술 및 작품]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 『정계(政誡)』 1권과 『계백료서(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전국에 반포하였다. 두 책은 현전하지 않지만,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관료들에게 정치의 원리나 위정자의 덕목 등을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건은 죽기 직전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몸소 작성하여 박술희(朴述熙)에게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훈요십조」는 후손들을 가르치고 경계하기 위한 글로, 왕건의 정치사상과 신앙 등을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묘소]
왕건이 943년 5월 29일 사망하자 고려는 현릉(顯陵)을 조성하여 왕건과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합장하였다. 현릉은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해선리 송악산 기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왕건의 묘호는 태조,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神聖大王)이다. 성종 대에 태묘(太廟)를 조성하여 994년 4월 왕건과 함께 혜종·정종·광종·대종·경종의 신주를 모셨다. 후대 왕들에 의하여 원명(元明)·광렬(光烈)·대정(大定)·장효(章孝)·인용(仁勇)·용열(勇烈) 등의 시호가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