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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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麗時代 |
영어공식명칭 | Korea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려/고려 |
집필자 | 홍승우 |
풍천원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 |
만월대 - 황해도 개성시 송악산 |
[정의]
918년부터 1392년까지의 고려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
[개설]
고려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을 무너뜨리고 개창한 나라이다. 태봉의 수도 철원에서 시작되었으나 건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던 개경으로 도읍을 옮겼고,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이어진 고려 시대를 한국의 중세(中世)로 본다.
고려 초 철원은 궁예의 몰락부터 왕건의 즉위까지 일대 사건이 급박하게 전개된 역사적 무대였다. 개경 천도 후 동주(東州)로 개칭되었다가 원간섭기에 다시 철원이라는 지명을 회복하였으며, 창원(昌原)·육창(陸昌) 등의 별호로도 불렸다. 고려 시기를 통틀어 철원은 중북부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 거점으로서 중시되었다.
[고려 성립 후 철원의 위상 변화]
918년 6월[음력] 철원에서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은 이듬해 1월[음력] 개경을 새로운 도읍으로 삼아 천도를 단행하였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천도를 계획하고 개경 일대를 재정비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전 왕조의 수도였던 철원에 머무르는 것은 왕건에게 큰 정치적 부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말년의 공포정치로 많은 민심이 궁예로부터 이반하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철원은 궁예의 시작을 함께 한 근거지였고, 왕건의 세력 기반이었던 패서(浿西) 지역과 긴장관계에 있는 곳이었다. 철원 천도를 전후하여 궁예의 고구려 계승의식이 희미해졌다는 점 또한 왕건이 철원을 떠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개경 천도 이후 왕건은 고구려 계승의식을 전면에 내세워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 반목하며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후 철원은 고려 말 새로운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기 전까지 정치적 위상이 위축된 채 주로 군사 거점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행정 편제]
고려의 수도가 개경으로 옮겨간 뒤 철원은 동주(東州)로 개편되었다. 995년 성종(成宗)은 당나라의 절도사(節度使) 체제를 도입하여 지방통치제도를 전면 재정비하면서 군사적 성격이 강한 단련사(團練使)를 동주에 파견하여 군정과 지방 행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려의 실정에 부합하지 않았던 단련사는 설치 10년 만인 1005년에 폐지되었고, 현종(顯宗) 9년인 1018년 더욱 행정적 성격이 강한 지주사(知州事)로 대체되었다. 같은 시기 김화군(金化郡)·삭녕현(朔寧縣)·평강현(平康縣)·장주현(漳州縣)·승령현(僧嶺縣)·이천현(伊川縣)·안협현(安峽縣)·동음현(洞陰縣)이 동주의 속현(屬縣)으로 편제되었다.
몽골(蒙古)과의 전쟁 이전까지 동주의 행정 편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동주를 포괄하던 교주도(交州道)가 무신집권기 춘주도(春州道)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동주도(東州道)로 개편된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동주의 위상은 1253년의 동주산성(東州山城) 전투를 계기로 일시 하락하였다.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백돈명(白敦明)의 군대가 동주산성에서 대패를 당하자 1254년 고종(高宗)은 동주를 현(縣)으로 강등시켜 패전의 책임을 물었다. 얼마 후 동주는 목(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 충선왕(忠宣王)이 여러 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다시 철원부(鐵原府)로 강등되었다.
[외세의 침략과 철원]
철원은 북방 이민족이 수도 개경으로 진격하기 위하여 거쳐야 할 길목에 있었다. 철원의 동주산성 일대는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고려 전시기 전략 방어의 요충으로 인식되었다. 1217년 거란유종(契丹遺種)의 침입, 1249년과 1257년 여진족 계통 동진(東眞)의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1291년 몽골 종왕(宗王) 카단[哈丹]의 침입 등 북방 이민족에 의한 외침이 발발할 때마다 철원은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철원이 붕괴되면 곧바로 수도 개경이 적의 위협에 직접 노출되었다. 고려 시대 철원은 북방 이민족에게 있어 한반도 중북부로 들어가기 위한 관문과도 같았던 것이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을 피해 방어하기 쉬운 곳을 찾는 과정에서 철원이 새로운 도읍지로 물망에 오르기도 하였다. 1377년 우왕(禑王)은 바다와 가까운 개경이 왜구에게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천도를 결심하고 철원에 궁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 최영(崔瑩)이 개경을 버리면 적에게 얕보일 것이고 또한 민생을 해치게 될 것이라는 논리로 완강히 반대함에 따라 천도 논의는 곧 정지되었다.
[철원의 대표 가문]
고려 시대 철원을 대표하는 가문으로 철원최씨(鐵原崔氏)를 들 수 있다. 철원최씨는 태조 왕건의 공신이었던 최준옹(崔俊邕)을 시조로 한다. 최준옹의 5대손인 최석(崔錫)과 6대손 최유청(崔惟淸)이 고려 중앙 정계에서 현달함에 따라 고려 중기 유력한 문벌로 거듭나게 되었다. 원간섭기 충선왕이 고려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들을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통칭할 때 철원최씨도 재상지종의 범주에 포함되었다. 고려 말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최영도 대표적인 철원최씨 출신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