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541
한자 鐵原城山城
영어공식명칭 Seongsanseong Fortress
이칭/별칭 성재산성,자모산성,가등산성,고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산121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경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3년 01월 18일연표보기 - 철원성산성 강원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철원성산성 강원도 기념물 재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 - 철원성산성 철원군지 증보편찬위원회 현황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4년 3월 28일~1994년 4월 16일 - 철원성산성 국립문화재연구소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4년 5월~1995년 4월 - 철원성산성 강원대학교박물관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6년 3월~1996년 11월 - 철원성산성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0년 - 철원성산성 육군사관학교 지표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6월 14일~2005년 12월 12일 - 철원성산성 강원문화재연구소 광역 지표조사
현 소재지 철원성산성 -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산121 일대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문화재연구소 -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로 132[문지동 472]
출토 유물 소장처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1-1
출토 유물 소장처 강원대학교 중앙박물관 - 강원도 춘천시 강원대학길 1[효자2동 192-1]
성격 성곽
양식 테뫼식 석축산성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880m[둘레-『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약 13m[높이-『신증동국여지승람』]|약 451m[1,489척][둘레-『신증동국여지승람』]
소유자 산림청 외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기념물

[정의]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에 있는 삼국 시대 또는 통일 신라 시대 산성.

[개설]

철원성산성(鐵原城山城)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성재산(城齋山) 정상부를 감싸고 만든 삼국 시대 혹은 통일 신라 시대 석축산성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망루터, 문터,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2003년 1월 18일 강원도 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강원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성재산성, 자모산성, 가등산성, 고성이라고도 부른다.

[건립 경위]

철원성산성의 축조 시기와 관련된 고대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성벽의 축조 방식의 신라의 성벽 축조 기술과 같고, 내부에서 고구려 및 통일 신라 시대 토기류가 다수 발견되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삼국 시대에 성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철원성산성에 대한 기록으로 『강원도지(江原道誌)』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장수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가 축성하였다는 설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 기록이 전하는 만큼 조선 전기에 이미 성으로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3~1908]에 비로소 성이 폐기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점으로 볼 때 조선 후기까지도 지속적으로 성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철원성산성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읍내리 산121 일대에 있다. 국도 제43호를 따라 학사교차로에서 읍내삼거리까지 약 6.1㎞ 이동하면 북서쪽으로 성재산이 보인다. 철원성산성성재산의 8부 능선에 석축 성벽을 쌓아 만들었다. 철원성산성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학사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민통선 마을인 생창리 방향으로 국도 제5호를 따라가면 백골부대 민간인 출입 통제선 초소가 나타난다. 민간인 출입 통제 지역 출입 절차를 거쳐 초소를 통과하고, 생창리 마을을 벗어나면 옛 김화읍 시가지가 있었던 읍내리가 나오고 두 번째 군 통제 초소를 만나게 된다. 다시 출입 절차를 재확인하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샘물교회로 이동하여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작전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성 내부로 진입하게 된다.

[형태]

철원성산성성재산 정상부를 두른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 축조 방식은 5세기 신라 진흥왕 대 수법이 확인된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초축 성벽에 덧대어 후대에 보축한 흔적들이 다수 확인된다. 『강원도 철원군 군사유적-지표조사 보고서』에 기록된 둘레는 880m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높이는 약 13m, 둘레는 약 451m[1,489척]이다.

[현황]

철원성산성은 1992년 철원군지 증보편찬위원회에서 현황 조사를 실시하였다. 1994년 3월 28일부터 1994년 4월 16일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토기 및 기와편을 채집하였고, 1994년 5월부터 1995년 4월까지 강원대학교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토기 및 기와편을 채집하였다. 1996년 3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성 둘레를 실측하고, 토기류 및 기와류와 석기류를 채집하였다. 2000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2004년 6월 14일부터 2005년 12월 12일까지 강원문화재연구소에서 광역 지표조사를 실시하였다.

현재 철원성산성의 성벽은 서남쪽 성벽의 일부 구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성의 외관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주변에서 통일 신라 시대 및 고구려 계통의 기와와 토기편들이 노출되어 있어 긴 시간 동안 성이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성벽의 붕괴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성벽의 보수 및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시급한 상황이다.

[의의와 평가]

철원성산성은 주변에 높은 산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방과 우측방의 이동 병력을 효과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고 읍에서 불과 4리[392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 시에 성으로 피신하여 전투를 벌이기에 용이하였다. 철원성산성의 축조 기법과 출토 유물들로 볼 때 처음 성이 만들어진 것은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후 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재활용되었다. 이러한 점은 철원성산성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상과 축성 기법 등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성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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