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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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영어공식명칭 | Korean War |
이칭/별칭 | 한국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강원도 철원 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전쟁.
[역사적 배경]
김일성은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하여 조·소 경제 문화 협정을 체결하고, 소련과 중국은 1950년 2월 우호 동맹 및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소련과 중국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얻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만반의 준비를 한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통일을 이루고자, 1950년 6월 25일 38도선을 넘어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하였다.
[경과]
6·25전쟁이 임박하였을 때 철원 지역 내 일반인들의 야간통행이 전면 금지되었다. 철원읍 시내에는 1주일 동안 거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였다. 금강산열차도 탈 수 없어 철원읍 시내 학교에도 갈 수 없었다. 금학산 아래에는 인민군 전차 부대가 있어 기동훈련이 자주 실시되었다. 밤에는 탱크가 이동하는 소리가 요란하였고, 병력과 군수물자 수송으로 분주하였다. 1950년 6월 24일 철원읍 시내 농업학교 운동장에 인민군들이 새까맣게 집결하여 있었는데 다음 날 모두 사라졌고, 이후 남쪽 방향에서 쿵쿵하는 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여 전쟁이 터졌음을 알게 되었다. 철원읍 인민위원회에서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군가와 혁명가가 계속 울려 퍼졌고, 공회당 안내판에는 인민군이 어디어디를 점령하였다는 전황이 수시로 올라왔다. 하지만 8월부터는 전황 안내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인민군이 패퇴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과 국군의 진격으로 인민군은 쫓겨 가고 1950년 9월 무렵 국군이 철원에 들어왔다. 이때 철원군 사람들의 70% 이상이 패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피란 갔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싫고 개인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북으로 가는 대열에서 몰래 빠져나와 산속으로 숨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전에 산속과 한탄강 동굴로 피신해 있었다. 미군 비행기의 포격과 기총 소리가 연이어 들렸고, 철원읍 시내는 불바다가 되어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은 방공호와 은신처에 숨어 지냈고 철원읍 시내에는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미군과 국군이 진주하여 남한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뽑아 치안대를 조직하고 마을을 지키게 하였다. 하지만 산속에 숨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밤이면 내려와 치안대와 교전을 벌이고 치안대 가족을 학살하였다. 낮에 치안대가 점령하면 다시 보복하였고, 이러한 일들이 수차례 반복되었는데 철원 사람들은 이를 ‘톱질한다’고 표현하였다.
1950년 12월 중공군의 공세로 미군과 국군이 퇴각할 때 철원읍 시내를 완전히 불 질러 없애 버렸다.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적에게 시설이 이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으나, 이로 인하여 철원읍 시가지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51년 5월 유엔군 재반격으로 철원 지역에 다시 미군과 국군이 진주하였다. 그리고 산속에 숨어 있던 주민들에게 “우리는 국군입니다. 산속에 있는 모든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지 말고 나오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을 계속하며 전단을 뿌려 대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피신처에서 나왔고 미군 트럭에 실려 38선 근처 포천 영평천 일대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대부분 남자들은 전방으로 다시 보내져 전선에서 KSC(Korean Service Corps)의 노무자로 일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기도 광나루[현재 서울 천호동] 피난민수용소로 보내졌다. 노무자들은 미군과 국군을 도와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개시된 이후부터 세계 전사(戰史)에 유래 없는 ‘제한 공격’이라는 전법이 6·25전쟁에 채택되었다. 진격을 감행하지 않을 뿐이지 거의 고정된 전선에서 근거리 고지 쟁탈전만 치열하게 벌어졌다. 한 능선, 한 고지에서 탈환과 퇴각을 20여 회 이상 반복하였고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 1952년 8월 5일부터 1952년 9월 28일까지 벌어진 김화 동북방 수도고지 전투와, 1952년 10월 6일부터 1952년 10월 15일까지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 14일부터 1952년 11월 24일까지 진행된 저격능선 전투 등이 모두 당시 벌어진 전투이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정전협정이 정식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간 참담하게 치러진 6·25전쟁은 종전이 아닌 휴전으로 막을 내리고, 한국 국민은 38선이 아닌 휴전선으로 제2의 분단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과]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전쟁으로 발생한 인명 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이른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 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 진영의 인명 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된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 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공업 시설의 절반 가량이 파괴되어 경제적·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하였다. 6·25전쟁은 해방 전후 번성하였던 철원 지역의 시가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의의와 평가]
6·25전쟁이 발발한 지 거의 70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철원·김화·평강 등지에는 6·25 격전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51년 6월부터 전선이 교착상태에서 공방전을 거듭하는 제한전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장비가 빈약하고 공습에 약하였던 인민군[중공군]은 산악이 많은 중부전선을 집중 공략하였다. 특히 지리적 조건이 좋은 철의 삼각지대는 쌍방의 혈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산화되었다. 철원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략적 가치가 높아 그 피해가 더욱 극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