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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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玉山面 金溪里 淸州 郭氏 集姓村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금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형수 |
전구간 | 옥산면 금계리 청주 곽씨 집성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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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 소재지 | 옥산면 금계리 청주 곽씨 집성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금계리 |
성격 | 집성촌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금계리에 형성된 청주 곽씨 성촌파의 집성촌.
[개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청주 곽씨(淸州 郭氏) 17세 곽음(郭廕)[1398~1474]이 금계리로 먼저 퇴거하였고, 이후 동생 곽비(郭庇)와 곽용(郭庸) 등이 내려와 살면서 후손들이 일대에 세거하게 되었다. 곽음의 둘째 아들 곽승의(郭承儀)는 진사공파(進士公派), 넷째 아들 곽승구(郭承求)는 백동파(栢洞派), 곽비의 큰아들 곽희(郭僖)는 회암파(回岩派), 둘째 아들 곽시(郭偲)는 성촌파, 곽용은 행당공파(杏塘公派)로 갈라져 나갔다. 금계리에는 18세 곽시, 19세 곽세형(郭世衡), 20세 곽충원(郭忠元), 21세 곽서(郭緖)로 이어지는 성촌파(城村派)를 중심으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금동리(金東里), 금평리(金坪里), 금북리(金北里), 신계리(新溪里), 곡수리(曲水里) 일부를 병합하였고, 금북리와 신계리에서 한 글자씩을 가져와 ‘금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금계리에는 동쪽 낮은 지대의 아랫말, 서쪽 높은 지대의 웃말, 동남쪽에 뚝 떨어져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청주 곽씨의 묘소와 재실이 있는 팔악골 등의 마을이 있다.
[자연환경]
금계리는 북쪽에 망덕산을 등지며 남쪽으로 병천천을 바라보고 있다. 병천천의 심한 곡류부를 아우르며 충적 평야가 발달하였고, 농수 활용이 원활하다.
[현황]
『조선의 취락』에 의하면 1933년 금계리의 청주 곽씨는 78호 중 64호로 동족 비율이 84.5%였으나 2023년 현재 90여 가구 중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로 감소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8일 곽서를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