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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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州 李氏 |
영어공식명칭 | Jeonju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본관 | 전주 이씨 본관 -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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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전주 이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마리 |
세거|집성지 | 전주 이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내둔리 |
세거|집성지 | 전주 이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용계리 |
성씨 시조 | 이한 |
입향 시조 | 이극륜 |
[정의]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극륜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전주 이씨(全州 李氏)의 시조는 신라 문성왕 시기에 사공(司空)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이한의 6세손 이긍휴(李兢休)가 고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여 사공을 지냈다. 이후 대대로 고려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8세손 이안사(李安社) 때 간도(間島)로 들어가서 원나라의 다루가치가 되었다. 이안사는 원래 전주 사람이었는데, 지주와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으로 옮겨 갔다가 얼마 뒤 지주가 다시 부임하여 오자 원나라로 건너간 것이다.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는 원나라의 천호(千戶)를 역임하였고, 이행리의 아들 이춘(李椿)도 천호를 역임하였다. 이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은 원나라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雙城)에서 천호로 있다가, 공민왕의 북강(北疆) 회수운동에 내응하여 쌍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을 세워 지방의 만호(萬戶) 겸 병마사(兵馬使)로 임명되었다.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李成桂)는 22세 때 처음으로 고려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북면의 병마사가 되어 원군(元軍)과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이성계는 고려 후기의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고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좌시중 배극렴 등 52인의 추대를 받아 조선을 창건하며 전주 이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전주 이씨의 분파는 122파로 대부분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안사의 상계(上系)에서 갈라진 파, 이안사 이후 이성계 이전에 갈라진 파, 이성계의 후손으로 왕자대군과 왕자군을 파조로 하는 파이다.
[입향 경위]
충청북도 청주에 입향한 전주 이씨는 각 파조별로 각지에 세거지를 마련하였다. 먼저 세종과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인 밀성군의 후손들이 있다. 밀성군의 증손자 광원군 이구수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막내 이극륜(李克綸)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서울의 거주가 불안하자 현재의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가마리에 정착을 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8세 이민핵(李敏核)은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워 유명해졌다. 이민핵은 당시 포상에서 제외되었으나, 1887년(고종 24) 사헌부감찰로 증직되었다. 가마리에 충신사(忠臣祠)를 세워 향사하였고, 1939년 사당 옆으로 충신각을 세웠다.
금성대군의 아들 이맹한(李孟漢)은 어머니 전주 최씨의 친정인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정착하였으며, 후손들은 옆 마을인 내둔리와 용계리에 퍼져 집성촌을 이루었다. 태조의 3남 익안대군 이방의(李芳毅)의 손자 이상(李常)의 묘소가 상당구 문의면 노현리에 마련되면서 익안대군파의 세거가 시작되었다. 광평대군의 7세손인 이장운(李長運)은 아버지 이유홍(李惟弘)이 광해군 시기에 참소를 당하여 강계로 귀양 간 사건으로 현재의 송절동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정종의 후손으로 종의군파와 덕천군파가 있다. 종의군파는 종의군의 증손자 이상노(李商老)가 1560년경 서촌동 내거마을로 입향하여 흥덕구 강내면 학천리와 서촌동에 세거하였다. 덕천군파는 덕천군의 증손자 이옥견(李玉堅)이 연산군 시기에 종친들의 화가 거듭되자 석곡동으로 낙향하면서 정착하였다. 성종의 후손으로는 성종의 13남 영산군의 후손들이 있다. 영산군의 4세손 이급(李汲)은 영변부사 이영발(李英發)의 딸과 혼인하여 장인의 병문안을 왔다가 병들어 사망한 후, 후손들이 흥덕구 문암동 일대에 정착하였다.
[현황]
1930년 국세 조사 통계 자료에 의거하면 전주 이씨는 남이면 가마리에 50가구가 거주하였다. 2000년 실시한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주 이씨는 청원군 내 세 번째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8가구, 6,688명이 거주하였다.
[관련 유적]
태종의 후손인 경녕군파는 경녕군의 6세손인 이광욱(李光郁)이 장락원직장을 지내다가 광해군이 즉위하자 청주로 낙향하였다. 묘소는 송정동 솔밭공원 내에 있다. 후손들은 수의동과 휴암동 일대에 널리 세거하였다. 전주 이씨는 각 파별로 청주 내에서도 세거지가 상이하여, 현재 북이면 용계리, 미원면 대신리, 문의면 노현리, 서촌동 일대에 묘소와 제단 등이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