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3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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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尙州 朴氏 |
영어공식명칭 | Sangju Par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윤용 |
본관 | 상주 박씨 본관 - 경상북도 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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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상주 박씨 입향지 - 충청북도 청주시 |
세거|집성지 | 상주 박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쌍청리 |
세거|집성지 | 상주 박씨 세거지 -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개신동 |
성씨 시조 | 박언창 |
입향 시조 | 박광보 |
[정의]
박언창을 시조로 하고 박광보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개설]
상주 박씨(尙州 朴氏) 중에서는 여러 명의 공신이 배출되었다. 박충경(朴忠卿)은 명종 때 정사공신에 책봉되었고, 박충간(朴忠侃)은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미리 알고 상소하여 공신이 된 후 상산부원군에 봉하여졌다. 인조 때 박유명(朴惟明)은 정사공신이 되고 상원군(商原君)에 봉하여졌다. 박세훈(朴世勳)은 중종 때 조광조가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면서 박세훈을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기묘사화 이후에는 초야에 묻혀 여생을 마쳤다. 이처럼 상주 박씨는 고려 때 개국공신이 된 후 계속 후손들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면서 유력 가문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상주 박씨의 거주지는 묘소의 위치가 전하지 않아 파악이 어렵지만, 대체로 상주를 중심으로 살다가 16세손 박유(朴濡) 때 개성과 파주 일대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연원]
상주 박씨의 시조는 사벌국왕인 박언창(朴彦昌)이다. 박언창은 박혁거세의 29세손 경명왕(景明王)의 둘째 아들로, 사벌대군(沙伐大君)에 봉하여졌다.
[입향 경위]
박유와 박유의 손자 박린까지 파주 일대에서 살았고, 박린의 아들 박광보(朴光輔)에 이르러 충청북도 청주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광보의 호는 금서재(琴書齋)이고, 한충(韓忠)의 추천으로 입궐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끝까지 바른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박광보는 안향과 함께 충청남도 연기의 합호서원(合湖書院)에 제향되었다. 박광보가 명종 대에서 선조 대 초반에 청주에 입향한 것은 동서였던 양씨(楊氏) 때문으로 추정된다. 양씨는 자식이 없어 박광보의 아들 박윤양(朴胤楊)이 이모부 양씨를 극진하게 모셨다. 이름까지 ‘윤양(胤楊)’으로 바꾸었는데, 양씨의 재산을 상속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청주에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상주 박씨는 청주에 들어온 이후 오송 쌍청리와 개신동을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상주 박씨는 주로 경주 김씨, 동래 정씨, 청주 한씨, 안동 김씨, 밀양 박씨 등과 혼인하며 지역 사족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관련 유적]
19세손 박광우(朴光佑)가 쓴 현판이 오죽헌 몽룡실의 대들보와 해운정, 선교장에 걸려 있다. 박광우는 이이가 청주목사 때 건의하여 신원되었으며, 1710년(숙종 36) 송천서원(松泉書院)[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양지리]에 제향되었다. 박광우의 묘소는 본래 경기도 파주 오리동에 있었으나 1960년대 후반에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수대리로 이장되었다. 묘갈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남이면 석실리에 24세손 박진(朴榗)의 둘째 부인과 관련하여 열부문(烈婦門)이 있는데 안에는 ‘열부 파평윤씨지문 숭정후삼임술(烈婦 波平尹氏之門 崇禎後三壬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