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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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義 朴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도연 |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 1337년 - 박의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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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 1403년 - 박의중 사망 |
본관 | 문의 박씨 본관 - 경상남도 밀양시 |
세거|집성지 | 문의 박씨 집성지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리 |
성씨 시조 | 박언침 |
입향 시조 | 박의중 |
[정의]
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의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세거 성씨.
[연원]
박혁거세(朴赫居世)의 29세손인 경명왕(景明王)의 큰아들 박언침(朴彦忱)을 시조로 하는 밀양 박씨는 크게 여러 본으로 나누어졌고, 다시 여러 파로 분파되었다. 『문의박씨대동보(文義朴氏大同譜)』에 의하면 문의 박씨의 입향조인 박의중(朴宜中)[1337~1403]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문명(文名)을 떨쳤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후 공을 세워 문의군(文義君)에 봉하여졌다. 1388년(우왕 14) 명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철령위(鐵嶺衛)의 철폐를 교섭하고 돌아와 창왕(昌王) 때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박의중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 개국과 함께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의 벼슬을 내려 회유한 이성계(李成桂)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김제로 내려가 절의를 지켰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박의중을 시조로 받들고, 밀양 박씨에서 분적하여 관향을 문의로 삼게 되었다.
[입향 경위]
문의 박씨는 박의중의 큰아들 박연(朴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공민왕 때 등과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냈고, 후손들이 성주·상주·영암·구미 등지에 세거하였다. 둘째 박행(朴行)은 고려 때 우상(右相)을 역임하였고, 후손들이 관서 지방과 해주·신천·재령 등지에 세거하였다. 현재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연제리를 비롯하여 충청북도 옥천군, 영동군, 괴산군, 단양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현황]
문의 박씨는 충청북도 각지에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충청북도 지역에 15가구, 청주시 지역에 5가구 정도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