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32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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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世居 姓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형수 |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 살고 있는 성씨.
[고려 시대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
우리나라는 본래 개인을 구별하는 이름만 있었다. 삼국 시대부터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각종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면서 한자를 쓰는 중국식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왕실, 귀족, 관료 순으로 중앙의 최상급 지배 집단이 차츰 성씨를 가졌다. 신라 후기 지방의 유력층인 호족들이 중앙을 모방하여 성씨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일부에 국한되었을 뿐이고 대부분의 지방 사람은 성씨가 없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과정에서 공로가 있는 인물에게 성씨를 내려 주는 사성(賜姓) 정책을 취하는 한편, 전국의 크고 작은 호족들에게 출신지나 거주지를 본관으로 하는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였다. 청주 지역의 경우 962년(광종 13) 만든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鐵幢竿)의 명문(銘文)을 통하여 김(金), 손(孫), 경(慶), 한(韓) 등의 토성이 확인된다. 이들 4성 인물들은 모두 청주의 토성으로 지방의 유력 지배층이었고, 중앙의 관직 제도를 모방한 나름의 관직 체계[관반(官班)]를 만들어 청주 지역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용두사철당간기(龍頭寺鐵幢竿記)」에 기록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김씨로는 김예종(金芮宗), 김희일(金希一), 김수□(金守□), 김석희(金釋希), 김관겸(金寬謙), 김원(金遠)이 있다. 손씨로는 손희(孫熙), 손인겸(孫仁謙), 손석(孫錫)이 있다. 경씨로는 경주홍(慶柱洪), 경기준(慶奇俊)이 있다. 한씨로는 한명식(韓明寔)이 있다. 「용두사철당간기」에는 용두사 철당간의 건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물들만 수록되었고 고려 시대 문헌에서 4성 외에 이(李), 곽(郭) 등 청주를 본관으로 성씨가 여럿 확인되기 때문에 실제 청주 지역의 토성은 더 많았을 것이다. 고려 시대 각지의 토성은 점차 상경관인(上京官人)과 재지이족(在地吏族)으로 분화되어 갔고, 처향(妻鄕) 또는 외향(外鄕)을 따라 거주지를 옮기거나 정치·사회적 변동으로 인하여 유망하는 등 다양한 요인으로 본관을 떠나 다른 지역에서 살았다.
[조선 전기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
조선 시대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는 지리지, 읍지, 족보 등 다수의 문헌에서 확인된다. 먼저 조선 전기의 경우 대표적인 문헌은 1454년(단종 2)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1530년(중종 25)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 있다. 두 자료는 시기상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청주목(淸州牧)의 성씨와 관련한 부분은 내용이 대동소이하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속현과 향·소·부곡 등 특수행정 구역 제외].
토성(土姓)으로는 한(韓)·이(李)·김(金)·곽(郭)·손(孫)·경(慶)·송(宋)·고(高)·준(俊)·양(楊)·동방(東方)·정(鄭)이 있다. 속성(續姓)으로는 서문(西門)이 있다. 내성(來姓)으로는 황보(皇甫)[개경(開京)]가 있다. 망래성(亡來姓)으로는 왕(王)[개경(開京)]·노(盧)[포천(抱川)]·유(柳)[목천(木川)]·홍(洪)[회인(懷仁)]·김(金)[경주(慶州)]이 있다. 망촌성(亡村姓)으로는 박(朴)·신(申)·갈(葛)·한(韓)[『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씨가 빠져 있음]이 있다.
토성은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위의 12개 토성이 모두 고려 초기부터 전하여 내려온 세거 성씨는 아니다. 그중에는 고려 후기 지방 세력으로 부상하여 중앙으로 진출하였거나 귀화인이 청주를 본관으로 얻은 경우도 섞여 있어서, 당대 청주목의 세거 성씨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속성은 토성 성립 이후 타지에서 이주하여 왔거나 현(縣)이 신설되면서 새롭게 등록된 성씨이다. 내성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하여 온 성씨이다. 망래성은 그들 가운데 없어진 성씨이며, 망촌성은 지방 행정의 말단 조직인 촌(村)에 집단을 이루어 살던 촌성 중에서 없어진 성씨를 말한다.
[조선 후기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
조선 후기의 경우 대표적인 문헌으로 18세기 중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들 수 있다. 『여지도서』보다 약간 늦은 시기로 추정되는 『낭성지(琅城誌)』를 비롯하여 19세기 후반에 저술된 청주의 읍지들은 대개 『여지도서』의 성씨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거나 축약하여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 청주목에 수록된 성씨는 모두 31개인데, 이를 정리[기재순]하면 다음과 같다.
이씨(李氏)에는 완산(完山)·한산(韓山)·청주(本州)·전의(全義)·경주(慶州)·고성(固城)이 있다. 한씨(韓氏)에는 청주가 있다. 김씨(金氏)에는 경주(慶州)·청풍(淸風)·안동(安東)·광주(光州)·연안(延安)이 있다. 송씨(宋氏)에는 은진(恩津)이 있다. 권씨(權氏)에는 안동(安東)이 있다. 정씨(鄭氏)에는 동래(東萊)·진주(晉州)·초계(草溪)가 있다. 고씨(高氏)에는 제주(濟州)가 있다. 양씨(楊氏)에는 중화(中和)가 있다. 곽씨(郭氏)에는 청주·현풍(玄風)이 있다. 손씨(孫氏)에는 구례(求禮)·밀양(密陽)이 있다. 노씨(盧氏)에는 교하(交河)가 있다. 류씨(柳氏)에는 문화(文化)가 있다. 홍씨(洪氏)에는 남양(南陽)·풍산(豐山)이 있다. 박씨(朴氏)에는 상주(尙州)·순천(順天)·반남(潘南)·밀양(密陽)이 있다. 신씨(申氏)에는 고령(高靈)·평산(平山)·아주(鵝洲)가 있다. 하씨(河氏)에는 진주(晉州)가 있다. 오씨(吳氏)에는 보성(寶城)이 있다. 조씨(趙氏)에는 배천(白川)·양주(楊州)·한양(漢陽)·평양(平壤)이 있다. 장씨(張氏)에는 인동(仁同)이 있다. 민씨(閔氏)에는 여흥(驪興)이 있다. 변씨(卞氏)에는 초계(草溪)가 있다. 최씨(崔氏)에는 화순(和順)·삭녕(朔寧)·경주(慶州)가 있다. 지씨(池氏)에는 충주(忠州)가 있다. 채씨(蔡氏)에는 인천(仁川)이 있다. 남씨(南氏)에는 의령(宜寧)이 있다. 강씨(姜氏)에는 진주(晉州)가 있다. 서씨(徐氏)에는 대구(大丘)가 있다. 임씨(任氏)에는 풍천(豐川)이 있다. 임씨(林氏)에는 부안(扶安)이 있다. 연씨(延氏)에는 곡산(谷山)이 있다. 마씨(馬氏)에는 속성이 있다.
청주를 본관으로 한 토성은 이씨, 한씨, 곽씨만 남고 거의 사라졌으며 전기보다 내성이 더욱 많아져 다양한 성씨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당쟁으로 인한 집권층의 변동, 양반층의 복거(卜居), 중인층과 서민층의 경제적 성장이나 신분 상승 등 다양한 정치 및 사회적 요인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17세기 이후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종법(宗法)에 입각한 가족 제도가 수용되면서 친족 체계에 일정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향촌 사족들이 입지를 강화하고 문중의 결속을 다지려는 노력과 결부됨으로써 18·19세기 향촌 사회에서는 부계 친족을 중심으로 한 집성촌, 즉 동족 마을이 형성되고 널리 퍼져 나갔다.
[근·현대 청주 지역의 세거 성씨]
1930년 조선총독부가 국세 조사의 일환으로 전국의 성씨와 본관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청주군(淸州郡)의 경우 수십여 개의 집성촌이 확인된다. 그중 60호 이상의 대성(大姓)으로는 보성 오씨[562가구], 고령 신씨[402가구], 순천 박씨[360가구], 경주 이씨[245가구], 경주 김씨[208가구], 밀양 박씨[201가구], 여흥 민씨[163가구], 청풍 김씨[136가구], 청주 곽씨[110가구], 남양 홍씨[100가구], 전주 이씨[96가구], 하동 정씨[95가구], 진주 유씨[93가구], 진주 정씨[90가구], 한산 이씨[78가구], 동래 정씨[72가구], 연안 이씨[65가구], 철원 최씨[61가구], 상주 박씨[60가구] 등이 있었다.
1961년 편찬된 『청주지(淸州誌)』에는 청주 8대 성이라 하여 수름재 한산 이씨, 모가울 밀양 박씨, 비홍 초계 변씨, 너더리 남양 홍씨, 대머리 청주 한씨, 민마루 여흥 민씨, 머뫼 교하 노씨, 산동 고령 신씨를 들고 있다. 8대 성은 출처가 명확하지 않으며 시기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청주 지역의 성씨 상황에 준하여 일부에서 구전된 바를 기록한 것이라 보인다. 근래에는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집성촌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으며, 여러 성씨가 빈번히 전·출입을 하고 있어서 대대로 거주한다는 ‘세거(世居)’의 의미가 점차 퇴색되어 가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