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202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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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해준,원용준 |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공자 사상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학문 및 의례 활동.
[개설]
충청북도 청주 지역은 남한의 중심부에 있어 조선 시대부터 기호유학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단양의 정도전, 청주의 정총(鄭摠) 등이 조선의 개국 공신으로 봉하여지고 청주의 한명회가 세조 등극에 공을 세우면서 청주는 조선 전기 유교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교의 정착과정]
유교가 우리나라에서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의 철학 사상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 귀족 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지방 중소 지주 출신의 관료,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개혁 집단은 위화도 회군 이후 조선 태조(太祖)를 도와 조선왕조를 개창하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척불숭유(斥佛崇儒) 정책을 펼쳐 주자학의 불교 비판, 민본 사상, 중화주의를 이념적 무기로 활용하여 토지 제도 개혁, 불교 비판, 친명 외교 등을 주장하였다. 조선 시대에 와서 유교는 전성기를 맞이하여 정치·사회·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영향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다. 조선 전기 유학은 고려 사회의 정신적 기반이었던 불교적 세계관을 붕괴시키고, 주자학적 세계관을 확립하며, 이에 근거한 새로운 신분 질서와 도덕규범을 확립한다. 15세기에 이르러 주자학의 명분론, 절의론은 길재로부터 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로 이어지는 사림파(士林派)에 의하여 더욱 발전한다. 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조광조(趙光祖)[1482~1519]는 도학 정치와 향촌 자치 추진으로 괄목할 만한 활동을 벌이다가 훈구파의 반격을 받아 기묘사화로 침몰하였다. 기묘사화 이후로 정계 진출을 단념한 사림들은 산림(山林)에서 학문에 전심하는 풍조가 일어났으며, 이후 조선 유학은 이황(李滉)과 기대승,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와 성혼(成渾) 간의 사단칠정 논쟁을 거쳐 16세기에 학문적으로 절정을 이루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실천적 의리 사상으로 표출되어 조헌(趙憲)[1544~1592]·곽재우(郭再祐)·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같은 충군애국의 의병 활동이 이어졌고,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한 뒤에는 송시열 등이 주축이 되어 북벌론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리학의 전통은 조선 후기와 근세에 외세를 배격하고 국난 극복에 앞장섰던 척사위정파로 계승되었다.
[청주지역의 유교문화]
청주 지역의 유교 발전은 유교 발전사에서 시대마다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 주며 발전하였다. 고려 후기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이초(彛初)의 옥’[이초와 윤이의 무고(誣告)에서 비롯된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옥에 갇혔던 사건과 강수 박훈(朴薰)[1484~1540], 김정, 한충 같은 저명 사림의 배출과 활약으로 유교 발전의 탯줄이 형성되었다.
청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의 유교 문화는 이이를 시조로 하여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로 이어지는 노론계 기호학파의 기반 위에 이루어졌다. 특히 호서사림의 원조로 여겨지는 김장생은 학문의 시작 단계부터 예학을 중시하였다. 예학의 강조는 이후 기호학파의 중요한 특색을 이룬다. 특히 송준길과 송시열은 예학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 이론을 밝히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시대적 과제로 삼았다. 이 시기에 동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의 당쟁이 치열하여지면서 유학은 사회적 지도력을 크게 상실하였다. 조선 후기 예송 논쟁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는 것은 이러한 연유이다. 송시열이 세운 화양서원은 18세기 이후 사림계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꼽힌다. 한편 송시열의 사후 학통은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 등 호락(湖洛) 논쟁이 일어나 이후 성리학계의 주요 논쟁점이 되었다. 권상하는 만동묘(萬東廟)를 건립하는 등 스승 송시열의 유지를 받들었고 송시열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에 힘썼다. 한말에 이르러 제국주의의 침략이 거세지자 구국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청원 지역 유학자들이 다수 활약하였다. 바로 조장하(趙章夏), 김제환(金濟煥), 신규식, 신채호 등이다. 청원 지역 유학자들의 사상적 기반에는 인류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교의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있었으며, 춘추대의는 송시열 등의 노론계 기호학파의 대표적 유교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청주 지역의 유교 교육]
조선 시대 청주 지역의 유교 교육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과거 응시를 위한 전문적 유교 지식인 양성과 일반 백성에 대한 교화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관학으로서의 교육은 향교가 담당하고, 사학으로서의 교육은 서원이 담당하였는데 지방에서는 일반적으로 교육보다 교화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관학을 살펴보면 충청 지역에는 모두 54개의 향교가 설치되었는데 그중 청주 지역 관학 교육의 대표 기관으로 문의향교(文義鄕校)를 들 수 있다. 문의향교는 교수관으로 종9품의 훈도(訓導) 1명에 정원이 30명으로 법제화되어 있었지만 그대로 실현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청주 지역의 유교 교육은 관학보다 사학인 서원에서 활발하여 중요한 의의를 지닌 서원이 상당수 건립되었다. 대표적인 서원으로 청주 신항서원(淸州 莘巷書院), 봉계서원(鳳溪書院), 송계서원(松溪書院), 노봉서원(魯峯書院), 기암서원(機巖書院), 송천서원(松泉書院), 쌍천서원(雙泉書院), 국계서원(菊溪書院), 검암서원(儉巖書院), 체화서원(棣華書院), 검담서원(黔潭書院), 백록서원(白鹿書院), 죽계서원(竹溪書院) 등이 있다. 청주 신항서원, 노봉서원, 쌍천서원, 검담서원, 기암서원, 국계서원 등은 기호학파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한 노론계 서원으로 꼽힌다. 그중 청주의 대표적인 서원인 청주 신항서원은 1570년(선조 3) 유정서원으로 창건되었다가 1660년(현종 원년) 사액을 받아 이름을 ‘신항서원’이라고 개칭하였다. 유림에 의하여 계속 중건되어 오다가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으로 폐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후 1892년 복구가 허가되어 1904년 복구되고 1957년 지방유지들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청주지역 유교문화의 의의]
청주 지역 유교의 특징으로는 이이의 영향력에 의하여 현실과 유리되지 않은 실천적 유학이 강조되는 점, 김장생의 학풍에 의한 예학(禮學)의 중시를 들 수 있다. 충청북도 유교의 실천적 성격 속에는 충절과 의리를 중시하는 경향도 강하였는데, 우암 송시열의 ‘춘추대의’ 정신으로 대표된다. 신채호(申采浩), 신규식(申圭植) 등이 유교를 벗어나 근대화와 국권 회복을 위하여 활약하였는데 충절과 의리을 중시하는 호서 유학의 영향이 있었다. 아울러 훈고학적인 학문도 겸하고 있던 유흥룡, 효행으로 유명한 변경복, 한말 구국 운동을 벌인 조장하, 김제환과 같은 유학자들을 통하여 청원 지역의 유교 전통이 다채롭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의 유교발전 과제]
현대 산업사 회가 무한 경쟁으로 인하여 혼돈과 도덕 불감증이 확대될수록 유교의 정신과 지성사적 전통은 오히려 강조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 현재의 유교가 극복할 과제도 많다. 가문과 특정 인물 선양 중심의 경쟁적 경향이라든가 권위적 유교의 퇴영적 확산이 대표적인 것이고, 향후 이들 유교에 대한 연구에서도 극복될 과제가 많다. 예컨대 조선 예학과 성리학의 주류를 형성하였던 호서사림과 유교에 대한 연구는 첫째 조선 전기 호서 지역 학맥에 대한 정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둘째 기왕의 연구가 17세기 몇몇 특정 인물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 또 그에 따라 학문적 계보와 원류에 대한 이해도 매우 축소·제한되었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연구 주제가 주로 철학[경학] 분야나 예론 분야에 집중되며 사회경제사 자료의 발굴도 미진하여 호서 학맥의 형성과 발전을 총체적으로 논의하기에 부족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