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2193
한자 祈雨祭
영어공식명칭 Ritual for Rain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유지영김해인

[정의]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 농사철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기원하며 지내던 제사.

[개설]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부터 농사가 생업의 기본이었고, 그중에서도 벼농사 중심으로 정착하여 왔다. 벼농사를 비롯한 모든 농사는 물이 필수였고 적절하게 비가 내려야 하는데,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조정과 지방 관청, 민간을 막론하고 가뭄을 해결하는 비를 바라며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는 주로 고을이나 마을 단위로 지냈기 때문에 큰 기우제는 관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민간에서 주술적으로 이루어진 기우제도 많았으니, 농경 사회에서 비가 지니는 중요성이 그만큼 컸음을 알 수 있다. 충청북도 청주 지역에서는 서원구 사직동의 사직단, 청원구 우암동의 와우산, 흥덕구 비하동부모산성, 상당구 산성동상당산성 등을 비롯하여 청주 양성산성, 구룡산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조선 시대 청주목의 기우제]

조선 시대에는 청주목사가 읍성 서쪽 사직단에 제물을 차려 놓고 기우제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사직단은 해마다 2월과 8월의 첫 번째 술일(戌日)에 청주목사가 제관이 되어 정기적으로 관행제(官行祭)를 지내는 장소인데, 가뭄이 심할 때면 청주목사가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가뭄이 더 지속되면 청주의 진산(鎭山)인 와우산에서 산신에게 기우제를 지내고 청주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하고 가난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부모산성에서도 기우제를 지냈는데, 조선 후기에 펴낸 읍지 모음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부모산성이 중심지의 서쪽 15리[약 5.89㎢]에 있고 부모산 정상 부근에 있는 큰 연못 모유정(母乳井)에서 가뭄에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고 한다.

[상당산성 기우제]

상당산성에서 지내던 기우제에 관련하여서는 꽤 자세하게 알려진 편이다. 기록에 따르면 상당산성 기우제는 상당산성의 서문인 미호문에서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200m 지점에 있는 절벽에 기우단을 만들어 지냈다. 특히 1671년(현종 12) 청주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청주 상당산성 기우제문(淸州 上黨山城 祈雨祭文)」은 “지난 가을과 그해 봄에 뿌린 씨앗이 말라 죽어 길과 도랑에는 굶어 죽은 사체가 늘어 가고 자식까지 생매장할 정도였다”며 당시 참혹하였던 봄 가뭄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민간의 주술적 기우제]

청주 지역에는 민간에서 무녀가 주도하여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는데, ‘대목할머니’라는 무당이 부녀자들을 이끌고 냇가에 제단을 차리고 며칠이고 비가 올 때까지 비를 비는 의례를 행하거나, 그해 첫아들을 낳은 여자가 북과 징을 두드리며 “사해 용왕님 오셔서 비 많이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계속 빌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민간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비 오기를 기원하였는데, 주로 부녀자들이 물가에 서서 곡식을 까부르는 키로 쌀이나 물을 떠서 까부르는 행동을 하며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때 “하느님께 비나이다. 비 오시게 비나이다”라고 하며 빌었고 부녀자들이 물을 끼얹으면서 “장마요~”라고 소리를 치기도 하였다. 또, 키를 씌운 여자를 앉혀 놓고 마을 사람들이 물을 뿌리기도 하고 삿갓을 씌우고 강물을 퍼다 붓기도 하는 기우제 풍속도 있었다. 또는 아들을 낳지 못한 여성을 골라 맹렬히 비를 비는 춤을 추게 하기도 하였다. 이때도 곡식을 까부르는 키를 사용하는데, 키에 강물을 담아 키 틈으로 새어 나오는 물을 여성이 온몸으로 맞게 하고 춤을 추게 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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