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집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676
한자 報恩集會
영어음역 Boeun Jiphoe
영어의미역 Well-wishers' Assembl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신영우

[정의]

1893년 동학교도들을 집결시키고 왕조정부에 정치개혁과 외세배격을 요구한 집회.

[개설]

동학교단은 4월 26일(음력 3월 11일)부터 5월 17일(음력 4월 2일)까지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리에서는 수 만명의 동학교도들을 집결시켜서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 아래 대대적인 집회를 열었다. 『취어(聚語)』에 의하면 전국에서 동학교도들이 장내리에 몰려왔는데 청주의 동학교도들도 290여명이 참여하였다.

보은집회는 왕조정부를 상대로 강력하게 정치개혁과 외세배격의 민의 전달하는 시위 형태로 진행되었다. 왕조정부는 선무사 어윤중(魚允中)을 보내서 해산을 종용하는 한편 청주병영의 병대를 파견하는 등 강력히 압박하여 집결한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

[역사적 배경]

교조 최제우(崔濟愚)[1824~1863]가 처형을 받은 뒤 사교로 금지되었던 동학교단은 교세가 성장하자 포교를 공인 받기 위해 1892년 11월부터 1893년 5월 초까지 충청남도 공주집회, 전라북도 삼례집회와 복합상소 운동을 벌였다. 이러한 동학교도들의 활동은 조선에서 벌어진 사회운동으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동학교단으로서도 피신과 수난을 거듭하던 종래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창도 초기부터 왕조정부의 탄압을 피해서 몰래 포교해 오던 동학 교단이 대규모 시위운동을 계획한 것은 교세의 확대에 자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시위운동이 1893년 4월 26일부터 5월 17일까지 벌였던 보은의 장내리집회였다. 전국에서 참가한 동학교도들과 함께 충청도의 동학교도들도 많은 수가 참여하였는데, 청주의 동학조직도 청의(淸義) 충의(忠義) 깃발 아래 대거 참여하였다.

[경과]

손병희(孫秉熙)[1861~1922], 손천민(孫天民), 서장옥 등 청주 일대에서 동학교세를 확대하던 지도자들이 교단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다. 보은집회에서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직접 지도부와 함께 도회소를 설치하고 조직적으로 시위를 통제하였다. ‘수만 명’이 모인 이 집회는 보은관아나 충청감영이 아닌 왕조정부가 직접 나서서 대처해야 했다. 동학교도들은 동학의 공인, 왜양의 배척, 관부의 백성 침탈 금지 등을 주장했으나 왕조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결과]

보은군수는 동학을 금지하는 정부의 지시를 거역할 명분으로 창의를 앞세웠다고 보았고, 선무사 어윤중은 동학교도들이 ‘양이(攘夷)를 가탁(假託)해서 난을 꾀하고 있다’고 했다. 청주성에 주둔한 진남영병이 보은까지 출진하고 정부가 강력히 해산을 종용하자 마침내 동학교도들은 해산하였다.

[의의와 평가]

보은집회는 큰 성과 없이 끝났지만 전국의 동학교도 수 만명이 참여했던 시위 경험은 그 다음해인 1894년 동학농민군의 전국적인 봉기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또 갖가지 성향의 사람들이 동학의 조직 안에서 사회운동을 벌여나갈 토대가 마련되었다. 청주에서 1894년 11월에 수천의 동학농민군이 봉기해서 읍성점거에 나선 것은 보은집회 이래 동학조직이 세력을 증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8.29 단순오탈자 수정 함게 ->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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