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제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201006
한자 新興製粉
영어공식명칭 Sinheung Miller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 168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태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연도/일시 1958년 2월 21일연표보기
설립자 민철기
대표 민철기→민현석

[정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내덕동에 있었던 제분업체.

[설립목적]

한국동란 후 극심한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잉여농산물 가운데 주종을 이루었던 소맥을 제분, 공급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설립경위]

한국동란 종전 무렵 정부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 정부지정 밀 제분 공장을 지정하였는데, 신흥정미소가 지정돼 1일 1백톤의 소맥을 처리하게 된다. 종전 후 미국이 ‘농업교역진흥 및 원조법(PL 480)’을 제정하고, ‘잉여농산물협정’ 체결에 따라 1956년부터 본격적으로 잉여농산물, 특히 소맥이 대거 반입됨에 따라 신흥정미소는 그 동안의 시설증설로는 한계를 느껴 신기술을 도입하게 된다.

1954년부터 3년간에 걸쳐 철근콘크리트 5층 건물, 건평 1천 2백평에 고성능 시우다와 롤라를 장착한 새 제분기 14대를 증설하는 한편 3개동 7백평의 창고를 갖추고 1955년 2월 신흥제분주식회사를 창립하게 되었다.

[변천]

신흥제분은 양곡정미업으로 성공한 창업주 민철기 사장이 1958년 창업하였으며, 이후 1972년 6월 15일 청주시 율량동 500-3[충청대로 114]에 율량공장을 확장하여 정부양곡 도정, 식품생산을 하였으며 대전시 인동에 있었던 장유공장 삼방사(종업원 1백여 명, 부지 4천여 평)를 인수하여 4층 규모의 새공장을 증설하고 인삼엑기스, 인조미, 간장 등을 생산하였다. 월남전 당시 두 공장에서 야전용 진중식품을 생산 납품하기도 하였으며 1965년 말부터 1972년말 까지 계속된 진중식품 납품은 분말고추장·인삼차·복숭아캔은 자체생산으로, 설탕·소금은 타 회사 제품을 납품받아 포장하는 방식이었다.

한국동란 전쟁 복구 특수에 이어 월남전특수로 이어지면서 승승장구하던 신흥제분은 지역사회의 여망에 따라 1968년 호텔업(속리산관광호텔)과 운수업(속리산고속)에 착수하는가 하면, 청원제사(68년), 중도석유(69년), 목장경영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그러나 호텔업이 예상 밖의 적자폭이 너무 커 운영난에 허덕이게 되었고, 1970년대 중후반 들어 식품부문의 수주물량도 현저히 떨어지는가 하면 주력인 제분에 있어서도 3분파동 이후 크게 오른 관세로 인해 원맥도입가격이 높아진데다가 수송비 인상에 따른 물류비 증가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인천부두에서 청주공장까지 원맥수송에 이어 생산된 소맥분을 다시 수도권일대에 운송하는 체제로서는 수도권의 제분회사와 경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닥친 1, 2차 오일쇼크는 결정타였다. 1985년을 전후하여 한 해 적자가 30억원, 3년만에 100억원의 누적적자를 기록하게 되자 대한제분공업협회에 25억원을 받고 제분쿼터를 넘겨 신흥제분의 간판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내덕동 신흥제분 건물은 헐리어 테니스코트가 되었다가 최근에는 골프연습장으로 변모하였고, 율량동 공장에는 특급호텔이 들어서고 있으며, 대전공장은 삼주물산에 넘어 갔다.

[주요사업과 업무]

외국에서 도입된 원맥을 제분하여 밀가루, 국수 등으로 공급하였으며, 이후 사업영역을 확대하여 간장·고추장·인삼엑기스·복숭아통조림 등 식료품을 생산 판매하였다.

[조직]

본사 공장에는 회장, 대표이사 사장, 전무이사, 상무이사 산하에 기획실장, 총무부장, 영업부장, 그리고 총무과, 경리과, 영업과, 업무과, 운수과 그리고 별도의 철근부와 목공부 등에 2백여 명이, 서울사무소, 인천지점, 대전공장, 율량공장 등 총 4백여 명이 근무하였다.

[의의와 평가]

신흥제분 창업주 한암 민철기 사장은 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였어도 근검 성실로써 ‘맨손으로 거만의 부’를 이룬 청주를 대표하는 기업인이었다.

1977년 신흥학원을 설립, 신흥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읎는 사람은 죽을 틈도 없는 벱이란다. 진실과 성의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서 나라에서 찾고 세계가 찾는 큰 인물이 돼야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산업 환경과 사회의 변화 그리고 치열한 경쟁구도 속에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사업전환, 전문경영인 양성 등을 통해 활로를 찾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육영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신흥고등학교는 오늘날까지 청주의 인문계 명문 고등학교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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