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500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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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山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 남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윤제 |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각북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각북면 서북쪽에 있는 남산리는 소말과 남산, 낙성[가말] 등의 자연 마을이 합쳐진 마을이다. 소말은 인근 마을에 비해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소(小) 마을, 작은 마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소리(小里) 또는 소촌(小村)이라고 적고 소말이라고 불러오고 있다. 남산이란 이름은 국담(菊潭) 박수춘(朴壽春)이 이 마을에 살면서 마을 앞산이 비교적 높아서 앞산 또는 남산이라고 불렀던 것이 남산이라는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박수춘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남산에다 성을 쌓고 의병 활동을 하여 산 이름을 ‘성마루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낙성(樂盛) 또는 가말은 남산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마을이다. 가마실, 부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은 서쪽 계곡 애골에 지금도 자기를 생산했던 자기요(瓷器窯)가 무너진 채 남아 있어 가마실로 부르고 있다.
[형성 및 변천]
밀양과 대구부에 속해 있던 당시의 역사는 기록이 없어 상세하게 알 수가 없다. 1768년 『대구읍지(大邱邑誌)』에 따르면 이곳의 지명은 남산 상리와 남산 하리였다. 『밀주지(密州誌)』에는 옛 사람이 살았던 기록이 없다고 하고 있으나, 남산리에는 고분군이 산재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대구군 각북면의 지역으로 남산이라 했으나 1906년(광무 10) 청도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낙성동 등을 병합하여 남산동이라 하여 각북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남산동에서 남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자연 환경]
비슬산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 남산리는 북·서·남쪽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슬산에서 생성된 물은 남산리에서 출발하여 청도천으로 흘러간다. 북쪽에 작은 고개를 넘으면 덕산리가 있고, 서남쪽 고개를 넘으면 풍각면 성곡리[장기]가 된다. 마을 앞으로 형성되어 있는 경지는 다랑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밭은 기후가 찬 것을 이용하여 사과 농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황]
2012년 8월 현재 면적은 10.46㎢이며, 총 255가구에 444명[남자 219명, 여자 225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은 각북면 덕촌리·삼평리, 서쪽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 용리, 남쪽은 풍각면 화산리·수월리·성곡리, 북쪽은 각북면 오산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행정리로 남산 1리부터 남산 3리까지 있으며, 소말, 남산(南山), 낙성(樂盛) 또는 가말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리에 각북면사무소가 있고 각북 파출소가 있다. 각북 초등학교와 각북 중학교가 있었으나 급격히 감소하는 인구로 인해 각북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비슬 도예원이 되었고, 중학교는 풍각 중학교 각북 분교장으로 남아 있다. 우체국과 농협이 있어 지역민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으며 각북 시장이 있었던 곳은 이제 흔적도 없다. 남산리 동쪽에는 남북으로 지방도 902호선이 지나고 있다.
외지에서 전원을 즐기러 들어와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남산 1길과 남산 3길 사이에는 남산 전원주택이 들어서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남산에서 성곡리로 이어지는 길 왼편에는 비슬 리조트가 있어서 인근 주민들의 휴식과 행사 장소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남산리 맨 아랫부분의 아자방(亞字房) 수목원과 찻집은 인근 대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풍각면 성곡리와 경계에 있는 성마루성은 둘레가 약 700m로 바깥 면은 석축(石築)이고, 안은 토축(土築)으로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한 박수춘이 의병을 지휘하면서 성을 쌓고 주민들을 피난시켰다고 전해진다.
남산리에는 오졸자 박한주와 국담 박수춘을 향사하는 남강서원과 남강재가 있으며. 이곳에는 국담의 유고집 판각과 조선 오현(五賢)[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의 친필 서장이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