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181
한자 李道彬
영어음역 Yi Dobin
이칭/별칭 도재(都哉)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
출신지 미상
성별
생년 1627년연표보기
몰년 1670년연표보기
본관 광주(廣州)
대표관직 삼도수군통제사

[정의]

조선 중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도재(都哉). 봉창수(蓬昌守) 이형엄(李炯儼)의 딸이 부인이며, 아들 이우항(李宇恒)[1648~1722]은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이도빈은 1627년(인조 5)에 태어났으며, 21세 때인 1648년(인조 26)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뒤에 선전관, 훈련원정(訓鍊院正), 시관(試官), 내금위장(內禁衛將) 등 무인으로서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도빈이 전라좌수사로서 여수 지역과 인연을 맺은 것은 1664년(현종 5) 1월이었다. 당시 전국은 기근과 질병 등으로 형편이 매우 좋지 않았으며, 좌수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이도빈은 스스로 법을 어기지 않고 좌수영의 주민과 군병에게 쌀과 포목을 넉넉히 지급하는 등 마음을 다하여 주민을 보살폈다. 관사, 성, 보루, 배, 그리고 많은 군사장비도 일신하였으며, 휘하의 사병과 진영의 모든 군병들이 이도빈을 칭송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였다.

좌수영 하인으로 끌려온 핸드릭 하멜(Hendrick Hamel) 등 12명의 네덜란드 선원들에게 모든 사역을 면제해 주었고, 가끔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따뜻한 대접도 했다. 심지어 귀향을 종용하기까지 했다. 『서암유고(西巖遺稿)』에는 이도빈이 허물어져 내린 여수 진남관(鎭南館)을 중수하면서 손수 상량문까지 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수 지역을 떠나 전라병사와 평안병사 등을 거친 이도빈은 1668년(숙종 14) 삼도수군통제사에까지 올라 다시 여수 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젊은 통제사 이도빈은 1669년(숙종 15) 6월 갑자기 오른손이 마비되고 말을 할 수 없는 중풍을 얻어, 1670년(숙종 16) 8월 15일 44세로 별세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도빈은 사후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여수 진남관(鎭南館) 경내에는 1683년(숙종 29)에 세워진 무휼선정비(撫恤善政碑)가 있다. 조선 중기 대사간과 형조판서를 지낸 이원정(李元禎)[1622~1680]은 『귀암선생문집』 제문에서 “족숙(族叔) 통제사(統制使) 이도빈은 어렸을 때부터 문장도 잘하였고, 행동도 독실하여 집안의 이름을 날렸다.”고 칭송하고 있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