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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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運 |
영어음역 | Jeong Un |
이칭/별칭 | 창진(昌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준옥 |
[정의]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서 활동한 무신.
[활동사항]
1543년(중종 38) 해남에서 증공조판서 정응정(鄭應禎)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경서(經書)를 가까이하였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웅천현감(熊川縣監)·제주판관 등을 지내면서 민의의 뜻은 따랐으나 부당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1591년(선조 24) 제주목사와의 불화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만호(鹿島萬戶)로 부임하여 여수 전라좌수영의 이순신 장군 휘하로 들어왔다. 옥포해전과 당포해전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1592년 9월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부산기사(釜山記事)」에는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하였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말미암은 것이며, 이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평활리 오소치(烏巢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4년(선조 37) 병조참판에, 1796년(정조 20) 병조판서겸의금부훈련원사에 추증되었다. 신위는 여수 영당(影堂)을 비롯하여 고흥 쌍충사(雙忠祠), 순천 충무사(忠武祠), 해남 충절사(忠節祠), 부산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