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30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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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영어의미역 | Buddhism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전라남도 여수시 |
집필자 | 진옥 |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개설]
불교는 흔히 깨달음의 종교라고 한다. 다른 종교가 사랑·인(仁)·박애 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반면에, 불교는 자연과 우주의 보편 원리로서 개개의 존재에 내재하는 본성을 깨달아 실현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교주는 석가모니이며, 깨달음을 위한 수행 방법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불경이 있다. 신도로는 깨달음을 위해 집을 나서 수행에 전념하는 사람들인 출가자와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불교를 따르는 재가자가 있다.
[변천]
1. 고대
고대의 여수는 4세기 후반 백제가 전라남도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라 전라남도 지역에 있던 여러 소국과 함께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5세기 중반 고구려의 남하로 백제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전라남도의 동부 지역이 일시적으로 대가야에 편입되었다. 뒤이어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통일신라가 들어섰으며, 다시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의 고려왕조로 넘어갔다.
여수의 불교가 가야의 불교와 연결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으나, 가야 불교 자체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빙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또한 ‘가락고찰’에 맥이 닿아 있는 남해 보리암 또한 여수만 너머 바로 지척에 있어 여수 불교의 유입 시기를 논할 때 종종 거론되기도 하나, 이 역시 신뢰할 만한 어떤 기록이나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원효 및 의상과의 관련을 강조하는 여수 지역 향일암의 연기 설화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2. 고려시대·조선시대
여수 지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유입된 것은 아직은 그 정설 여부가 불명확하기는 하나, 『흥국사사적기』(1691)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본다. 『흥국사사적기』에서는 먼저 송광사의 수선결사(修禪結社)를 주도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그 이전의 대구 팔공산 거조암 결사 시절에 다른 결사처를 찾다가 지금의 돌산읍 남면 금오도에 머물게 된 과정이 밝혀져 있다. 뒤이어 그 뱃길 위에 있던 돌산에 은적암을 창건하고 다시 1195년(명종 25)에 흥국사를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흥국사에 오래 머물지는 않고 바로 송광사로 법석을 옮겼다. 당시 흥국사의 규모는 암자 정도에 불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1560년경 흥국사는 보조의 법손인 법수대사(法修大師)에 의해 중창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맞아 이순신과 함께 전라좌도의 구례·광주·곡성·고흥·남해·순천·여수 등에서 300여 명의 승려들이 흥국사에 모여들면서 비로소 여수의 불교 유입이 본격화되었다. 임진왜란 기간 내내 의승수군으로 전투에 참전하여 국가와 민족을 고난으로부터 구하고자 했던 호국 불교가 바로 그것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전후 복구 사업 참여는 물론, 일본의 재침을 민중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전장에서 산화한 고혼들을 추모하는 수륙고혼 천도재를 300여 년에 걸쳐 지내왔으며, 이것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또한 왜군의 재침에 대비해 300여 명의 승군을 계속 유지하였으며, 흥국사를 비롯한 여수 일원의 석천사·한산사·향일암·은적암·용문사·만흥사 등에 최대 627명의 승려가 상주하면서 구한말 전까지 국가의 안녕 기원과 불법 수행에 크게 주력하였다.
특히, 이 시기를 전후해 주목할 만한 점은 전장에서 돌아온 승려들 중심의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가 흥국사 보광전(普光殿)에서 시작된 사실이다. 염불만일회는 1만 일, 곧 27년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하고 염불하여 해탈과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모임이다. 이 수행 모임은 일찍이 신라시대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 불교의 전통 수행법 가운데 화두참구(話頭參究)와 쌍벽을 이루면서 승속 모두에게 애호되었다. 이를 통해 산문을 나서서는 임전무퇴의 호국신장으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고, 물러나서는 출가 본연의 엄정한 수행자로 복귀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던 당시의 승가상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한국 불교 혹은 여수 불교의 대체적인 현황을 파악하는 데에는 이순신의 영정을 봉안한 충민사와 그 수호 사찰인 석천사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유익하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 임진왜란 이후 유불(儒彿) 사이의 애증, 임진왜란에 이어 재침한 일본 민족의 우리 민족혼 말살 정책 등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다.
석천사의 출발은 옥형 승려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충무공전서』에 의하면, 임진왜란 중 옥형은 군량을 대기도 하고 승대장으로 활약하기도 하다가 이순신이 죽자 충민사 바로 옆에 초당을 짓고 재향을 올리는 일로 말년을 보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여기의 ‘초당’이 석천사의 전신이다. 충민사는 이에 앞서 당시 전라좌수영의 박대복이 전사한 이순신의 충절을 흠모하여 이순신이 생전에 애호하던 마래산 중턱의 석천(石泉) 가에 지은 재실을 가리킨다.
신분제도가 엄연했던 시절에 유림의 사당과 불교의 난야(蘭若: 사찰)가 이와 같이 벽도 담도 없이 흔연히 서로 부조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가장 하층의 천민 계급에 속한 불승으로서 국가 방위조직의 최고 사령에 속했던 인물을 사사로이 추모하고 공양함에 있어서랴. 또한 동서의 재실도 없고 승려가 거처하는 방도 두 칸뿐이어서 늘 불편하던 차에 1709년 충민공(忠愍公)이 내방해 사당골을 만들고 재실을 건립한 일도 있었다. 이는 종교와 신분을 떠나 유림도 불승도 벼슬아치도 누란의 국난 앞에 몸을 던져 함께 그 위기를 수습하면서 우러난 동지 의식 또는 전우애가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림들의 불교에 대한 천시는 그 뿌리가 깊어 구한말까지 지속되어 횡포가 심하였다. 승장이며 석천사 중창주이고 충민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옥형과 자운의 영정을 모시고 매년 3월 중순 정(丁)일에 재를 지냈으나, 지역 유림측의 압력에 의해 흥국사로 옮겨 재를 지내는 일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시 지배 계급이 추구하던 억불숭유의 이념과 제도의 벽이 완강하고 맹목적이라는 것을 거듭 절감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3.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에는 흥국사에서 재를 지내는 일마저도 강제적으로 중지되었다. 이 밖에도 임진왜란에서 패퇴한 일본은 한일합방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투혼을 제압할 목적에서 갖가지 만행을 획책하였다.
일제에게는 여수 지역민들의 이순신에 대한 절대적 추앙과 일본에 대한 누대의 적대 의식이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차단하고 대비할 목적으로 총독부에서는 가장 먼저 충민사를 없애기 위해 그 부지 매입을 시도하였다. 다행이도 여수 지역의 유림들과 승려들이 충민사 부지를 공동 명의로 등기함으로써 간신히 위기를 넘겼으나, 수백 년을 이어오던 수륙재는 곧 중단되었으며, 충민사 참배도 금지되었다. 그러나 석천사 신도로 가장하여 숨어 재를 올리는 일까지는 일제 관헌도 어찌하지 못했다.
일제는 마침내 석천사로 눈을 돌렸다. 이미 세상을 뜬 지 오래지만, 옥형과 자운의 이순신에 대한 굳은 충절이 석천사를 비롯한 여수 지역 주민들의 마음을 여전히 강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석천사로 들이닥친 일본인 경찰서장은 서둘러 두 승려의 영정을 압수해갔다. 이후 두 영정은 나라가 해방될 때까지 석천사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행방불명 상태다. 두 선사의 영정에 관한 기록인 『이선사영정기(二禪師影幀記)』의 소재도 불분명하다.
4. 현대
해방 이후 6·25 민족상잔을 포함하는 국가 혼란기 중의 여수 불교에 관한 기록은 아직 정리된 것이 없다. 이는 여수 지역 불교인들이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 뒤를 이어 전개된 지역 불교계의 움직임을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8년, 충민사 성역화라는 국책 사업이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풍상에 시달리며 모진 세월을 견뎌온 사당의 당우를 개수하고 경역을 정비하는 일은 이순신의 위업에 비추어 늦은 감도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당시 정권이 그 사업을 추진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 구국의 명장인 무인(武人) 이순신을 앞세워 군사 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것이 그 진의였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앙 정부의 숨겨진 의도와 지역 사회의 개발에 대한 기대가 서로 호응하는 가운데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지역 불교계로서는 당연히 충민사와의 불가분한 관계상, 그 시행 과정 안에 석천사와 관련된 사업도 포함되어 있으리라고 믿었다. 충민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석천사를 제외한다는 것은 양자간의 역사적인 관계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가고 말았으며, 그와는 정반대되는 결과에 여수 지역 불교계는 아연실색하였다. 성역화 과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충민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충민사 주변 경역은 옛 모습이 심히 훼손되었다. 물론 이는 애초 계획된 일이어서 긍정적이고 전향적인 시각으로 달리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업에서 제외된 석천사는 오히려 바로 그 현장 옆에 위치한 까닭에 공사 과정 중 역으로 일련의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임진왜란 이후 300여 년 동안 석천사 주지와 지역 유림들이 함께 제향해오던 요사가 없어졌다. 대웅전 앞마당 아래에는 새로 충민사 관리실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절을 오가는 출입로가 바뀌면서 일주문도 자연히 철거되었다. 그리고 유·무형의 어떤 경계도 존재하지 않았던 두 경역은 서로 생경스러워지고 사이도 더 멀어졌다.
1980년대 이후 최근 여수 불교계의 동향은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사찰 혹은 승려들의 조직화이며, 다른 하나는 복지 사업에의 적극적 참여다. 승려들의 조직화는 1985년 여수지역 사암연합회 결성으로 구체화되었다. 사암연합회는 여수를 포함한 전국 각지의 해당 지역 사암 주지들이 임의로 결성한 협의 기구적 성격의 불교 단체이다. 지역에 따라 초종단적인 회원 구성을 보이는 곳도 많다. 주로 지역 내 불교 관련 현안을 함께 논의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한다. 초대 회장은 흥국사 주지 명선 승려이며, 현재의 회장은 석천사 주지 진옥 승려이다.
여수 지역 사암연합회의 활동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점은 한일합방 이래 단절된 수륙대재(水陸大齋)의 맥을 회복한 일이다. 이곳의 수륙대재는 1598년 이순신이 이락포(李落浦) 앞바다에서 전사하면서 자운 승려에 의해 최초로 봉행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인해 강제로 중단된 이래 여수 지역 사암연합회에 의해 부활된 지 올해로 24년째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 앞에 죽어간 민·관·군·불·유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오직 왕생극락하기만을 기원하는 수륙대재의 부활은 시대를 넘어 여수 지역 사회 전 영역에 걸친 화합과 소통을 위해서도 커다란 의미가 있다.
여수 불교계의 사회복지사업 참여는 다른 지역에 비해 괄목할 만한 점이 많다. 그 첫걸음은 1994년 석천사에서 지역 최초의 종합사회복지시설인 문수종합사회복지관을 위탁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흥국사[주지: 명선]·향일암[주지: 종삼]·달마사[주지: 명현]에서도 연이어 복지 시설을 수탁운영하면서 여수 불교계의 복지사업은 양과 질 양면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사찰별로 분산된 역량을 집약하여 사업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보문복지회[회장: 진옥]의 결성은 지역 불교계의 복지 사업 참여 의지와 운영 능력 제고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2008년 2월 현재, 보문복지회 산하 사회 복지 관련 시설은 모두 10여 곳에 이른다. 공사 중이거나 계획 중인 것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고령 인구의 급속한 증가 및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현저한 여수 지역의 특성상 보문복지회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 또한 날로 높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여수 불교계는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현황]
여수시의 사찰은 총 54개가 있다. 이는 종단을 구분하지 않은 전체 불교사암 숫자이다. 승려는 90여 명으로 대부분 여수시 사암연합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1년에 한 번 수륙대재·부처님 오신날 제등행렬·진남제 의승수군 재현 행사에 공동으로 참가한다.
여수시 불교계가 운영하는 복지 시설에는 2008년 2월 현재 문수종합사회복지관·동여수노인복지회관·여수시 노인복지회관·노인 요양 시설 하얀연꽃·여수 지역 자활센터·여수시니어클럽·옹달샘 어린이집·연꽃 어린이집·문수 지역 아동센터·노인 요양 시설 마니원 등이 있다. 각 사찰에 속한 불교 신도들은 각종 봉사 단체를 조직하여 이 시설들을 지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