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1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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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千年-地域特産物盈德-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경희 |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일원 해역에서 생산되는 지역 특산물 영덕대게에 얽힌 이야기.
[개설]
영덕대게는 영덕군이 자랑하는 특산물이다. 이 때문에 해마다 12월이면 강구대교에서 축산면 경정2리 원조 대게마을로 이어지는 강구항과 축산항 일대 영덕대게길 20㎞는 푸른 동해의 파도를 즐기며, 대게를 맛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이런 관광 행렬은 부산에서 강원도 고성에 이르는 688㎞의 길이 동해안 해파랑길을 조성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다. 해파랑길 중 강구면 대게공원을 출발하여 축산항을 거쳐 고래불해수욕장에 이르는 약 64.6㎞의 해안 길이 영덕군에 편입됨으로써 영덕을 찾는 관광 행렬은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다. 특히 영덕군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천 년을 이어온 지역 특산물, 영덕대게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관광지로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영덕 대게의 유래]
영덕대게의 한자어 표기는 죽해(竹蟹), 이는 몸통에서 뻗어나간 8개의 다리 모양이 대나무처럼 곧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덕대게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설이 있다. 그중 하나는 예주[지금의 영해 지역] 연혁에서 나타나듯이, 940년(태조 23) 왕건이 이 지역을 순시하였고, 이때 대게가 임금의 주안상에 올랐다는 것이다. 그리고 1346년(충목왕 2) 예주 부사가 현재 대게 원조 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을 순시할 때 대게를 대접하였고, 이를 근거로 마을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초기 지방 특산품인 대게를 조공하여 임금의 수라상에 올렸고, 대게의 특별한 맛이 생각난 임금이 신하에게 다시 대게를 구해오라고 명하였는데, 임금의 명을 받은 신하가 영덕군 축산면 죽도에서 한 어부가 잡은 게를 찾게 되었다는 설이다. 신하가 그때 어부에게 게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으나 어부가 대답하지 못하였고, 여러 의논 끝에 대나무 섬을 지나오면서 잡아 온 게의 다리가 대나무 마디와 같이 길쭉하다는 의미에서 결국 죽해(竹蟹)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또한 1530년(중종 25)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토산물조(土産物條)를 보면, 조선 팔도에 게가 생산되는 고을이 71개소이며, 그중 자해(紫蟹)가 나는 지역은 경상도·강원도·함경도의 11개 지역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 11개 지역 가운데 영덕과 영해의 지명이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 자해는 홍게와 지금의 대게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덕 대게 이모저모]
영덕대게는 영덕군의 영해 대진(大津) 앞바다에서 감포(甘浦) 앞바다에 걸쳐 있는데, 영덕군 일원의 앞바다가 주산지이며, 어획 기간은 12월에서 다음 해 5월까지이다. 영덕대게는 다른 지역의 대게에 비해 몸통과 다리가 크고 껍질이 얇으며, 살이 많고, 맛이 담백하다. 특히 강구면과 축산면 앞바다에서 3~4월에 잡힌 영덕대게는 우리나라의 대게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이곳 바다 밑바닥은 개흙이 전혀 없고 깨끗한 모래층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게의 갑각은 그 윤곽이 둥근 삼각형에 가깝고, 너비는 길이보다 약간 더 넓으며, 갑각 언저리에 작은 가시가 15~20개 정도 있다. 집게발은 보각보다 짧은데, 수컷은 암컷보다 훨씬 크다. 걷는 다리는 모두 비교적 납작하며, 제1, 제2 걷는 다리는 매우 길고 약간 두툼하며 납작하다. 제3 걷는 다리는 이보다 약간 짧으며, 제4 걷는 다리는 매우 짧고 가늘다. 몸 빛깔은 주황색 또는 연한 밤색이다. 대게는 우리나라 경상북도 이북의 동해안, 주로 함경북도 연안에 많이 분포하며, 이북 지역의 화도학산, 함경만내, 동향화, 양도 등에도 서식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해 서남 해역인 북륙(北陸), 산음(山陰) 등이 꼽히며, 양적으로는 노우도우 이서의 섬까지의 냉수대에서 많이 잡히고 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오오츠크해, 캄차카해, 베링해, 알라스카해, 북미서안, 그린란드 등에 분포하고 있으나, 대체로 우리나라 동해와 일본 열도의 서해안에 둥근 모양으로 수심 200~400m의 대륙붕 연변부와 중앙부 및 대화퇴에 분포하고 있다.
대게의 서식 장소는 바다의 수심 100m에서 300m의 모래바닥, 또는 진흙이 있는 곳으로 수온이 연중을 통하여 섭씨 3℃ 이하인 수심 200~400m 지역이다. 암컷과 수컷의 서식처는 대체로 분리되어 있으며, 미성숙 개체와 암컷의 어미는 수심 200~300m의 대륙 경사면에 주로 서식한다. 수컷의 큰 것은 300m 이상의 수심에서 서식한다. 바다 밑 400~600m 정도의 수역에서는 대게와 붉은대게 사이의 자연교잡종도 다소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다.
대게가 좋아하는 먹이는 다른 종류의 게, 새우 등과 오징어, 문어와 갯지렁이 등으로 비교적 잡식성이다. 대게의 크기는 생물학적으로 최소의 성숙 기준을 갑폭으로 하고 있는데, 수컷의 경우 6.6㎝, 암컷의 경우는 6.3㎝이다. 가장 큰 것은 수컷의 경우 갑폭이 18~20㎝ 정도, 암컷의 경우는 10~12㎝ 정도라고 하며, 분포 수역에 따라 같은 대게 종이라 하여도 그 크기가 다르다.
영덕 지방에서는 대게의 암컷은 흔히 찐빵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빵게라고 부르기도 하며, 수컷에 비하여 갑폭이 절반 정도로 작고, 부화할 때까지 약 1년간 외복부에 알을 가지고 있다. 대게의 자연 상태의 수명은 암컷은 부화 후 6~8년에 어미로서 성장한 이후 탈피하지 않고 3~4년을 더 살고 있으니 9~12년 정도이며, 수컷은 암컷보다 2~3년 정도 더 오래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서식하는 대게의 교미 시기는 처음 교미인 경우는 1~2월경 수심 70~90㎝ 내외의 얕은 곳에서 이루어지며, 두 번째 이후는 2~5월경, 대체로 3~4월경에 수심 180m 부근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산란은 2월경에 일어나며, 두 번째 이후 산란 개체의 산란은 5월경까지 일어나다. 대게의 부화는 산란한 다음 해 3월에서 5월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대게를 포획하지 못하도록 12월부터 5월까지를 포획 금지기로 설정한 것도 최소한의 산란 기간과 새끼 대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 할 수 있다.
[대게를 처음 잡은 곳, 축산면 차유마을]
영덕군에서 대게 원조마을로 전해지는 곳은 축산면 경정2리 차유마을이다. 이곳은 고려 태조 왕건이 순시한 곳이고, 1346년 예주 부사 정방필(鄭邦弼)이 이 마을에 우마차[牛車]를 타고 마미산을 넘어와 대게 대접을 받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경정(景汀)이란 지명은 마을에 긴 모래불이 있으므로 불여진 이름이며, 1425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 경정포(景汀浦)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지경(地境)인 오매동과 차유동의 일부와 경정동을 병합하여 경정동이라 하여 축산면에 편입하였고, 1945년 경정을 경정1동, 차유를 경정2동, 지경·오매를 경정3동으로 나누었으며, 1988년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차유동(車踰洞)이라는 마을 명칭은 1346년 예주 부사가 이름 없는 마을에 우마차를 타고 넘어왔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연유로 이 마을은 오래전부터 대게 원조 마을로 알려져 왔고, 제2회 영덕군민의 날 행사가 열렸던 1999년 4월 17일 영덕군으로부터 ‘영덕대게 원조마을’로 지정받아 경정2리에 조성한 공원에 기념탑을 세워두고 있다.
2021년 7월 말 방문하였던 차유마을은 자동차에서 내리면 바로 푸른 바다가 보이고, 눈앞에 보이는 ‘일성호 선주집 부자 영덕대게 민박’, ‘현정이네 민박’ 간판들을 지나면 급한 경사로를 따라 해변까지 80호가 옹기종기 들어선, 파도가 동네 어귀까지 들이치는 오래된 어촌 마을이었다. 마을은 대로변 버스정류장 앞에서부터 1반이 시작되고 언덕길과 방파제를 따라 2반, 3반, 4반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의 시작점에서 끝나는 곳까지는 대략 500m 길이이다. 마을 집들은 대부분 펜션과 민박집, 대게 회센터 등의 간판을 내걸고 있었으며, 대게를 파는 곳은 대부분 직접 대게잡이 배들을 가진 선주였다. 동네에서 만났던 한 주민이 어망을 손질하면서 “지금은 대게 금어기여서 가자미를 잡는다.”고 알려주었다. ‘영덕대게 원조마을’ 표지석은 마을이 끝나는 4반 위치, 경정항 방파제 위쪽에 ‘방탄소년단[BTS] 뮤직비디오 화양 촬영 장소’란 사진과 함께 세워져 있었다. 마을이 시작되는 1반에 세울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곳에 세웠다고 한다
[강구면에 들어섰던 대게 가공공장, 조일산업]
영덕대게의 가공은 이미 1937년 완공된 강구면과 축산면의 통조림 공장 2개소에서 시작되어 동해안 해산물 공급 교통의 요충지였던 강구항을 통해 서울, 부산, 대구 등으로 팔려나갔다. 영덕대게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은 1950년대 당시 수산물 가공업체였던 강구항의 조일산업주식회사가 통조림 대게를 생산하면서부터였다. 이 때문에 영덕대게의 수요는 급증하였고, 남획이 이루어져 생산량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당시 조일산업주식회사가 통조림 대게를 생산하게 된 배경에는 대게가 강구 앞바다 수심 약 300m쯤이던 무화짬 근처에서 많이 잡히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강구면 오포3리에 사무실을 두고 삼사리에 공장을 지어 운영하던 조일산업주식회사는 원래 꽁치. 고등어 등 해산물을 가공하여 ‘별표 통조림’ 상표를 붙여 판매하던 회사였으며, 1970년대에는 지역에서 생산되던 복숭아를 가공하여 복숭아 통조림을 전국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공장은 1980년대에 폐업하였고, 현재는 그 흔적조차 전하지 않는다.
[영덕대게거리, 한국 관광의 별이 되다.]
영덕군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강구항 일원 ‘영덕대게 거리’는 2005년 12월 영덕대게 특구로 지정되었다. 영덕대게 특구는 영덕대게의 경제적 가치 보호를 위한 지리적 표시제 도입, 영덕대게 캐릭터 개발과 상표 등록의 중심에 서 있다. 그리고 2013년, ‘영덕대게 거리’는 음식 테마 거리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 한국 관광의 별[음식 부문]로 선정되었다. 이런 역사를 대변하듯 강구면 영덕대교에서 축산면 경정2리에 이르는 길 곳곳에는 영덕대게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그중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강구항 초입, 강구대교 초입에서 여행객을 반기는 대형 대게 조형물이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면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촬영지 표지판, 2015년 선정된 강구항 영덕대게 거리 한국 관광의 별 수상 표지판, 그리고 길 따라 늘어선 100여 호의 강구항 영덕대게 회직판장들의 간판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대게를 파는 상점들의 모습이 뜸해질 만하면 강구항과 해파랑공원, 강구항 영덕대게 거리[한국 관광공사 지정 음식 테마 거리] 표지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덕대게가 지닌 전국적 명성에 걸맞게 이곳에서 영업하고 있는 집들은 저마다 ’50년 전통을 자랑하는 대게 요릿집, ’생방송 오늘 아침에 출연한 집’, ’KBS 6시 내 고향에 출연한 집’ 등의 간판을 내걸고 있다.
[영덕관광, 영덕경제의 중심, 영덕대게]
전국 1위 생산량을 자랑하는 대게에 대한 영덕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특별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위에서 살펴본 차유마을 외에 강구항을 중심으로 형성된 영덕대게 정보화 마을이 있다. 이 마을들은 영덕군이 고려시대 때부터 유명한 ‘영덕대게’의 본고장임을 대변하고 있다. 영덕대게 정보화 마을은 2002년 5월 1일 행정안전부로부터 정보화 마을로 지정받았으며, 강구항을 끼고 3㎞에 이르는 거리를 따라 100여 개의 대게 상가가 밀집한, 세계에서 가장 길고 규모가 큰 ‘대게 거리’를 만들었다. 강구면과 축산면, 병곡면 일원 11만 8251㎡에 조성된 영덕대게 특구도 영덕 사람들이 얼마나 영덕대게를 중요한 지역 특산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과물이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영덕대게는 일찍부터 지역 소득에 큰 영향을 주어 왔다. 영덕대게의 가공은 이미 1950년대부터 전국적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동해안 해산물 공급 교통의 요충지였던 강구항을 통해 서울, 부산, 대구 등지로 팔려나갔다.
영덕군은 1969년부터 군이 발행하는 『통계년보』의 표지에 영덕대게 모양을 형상화하여 도안하고 이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영덕대게를 대표적인 영덕 특산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현재 영덕군의 모든 홍보물, 행사의 중심에는 영덕대게가 자리잡고 있다. 영덕대게는 이제 영덕 관광과 영덕 경제의 중심에 서 있으며, 영덕 군민에 의해 보존·보호되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어야 할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