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32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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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善里- |
영어의미역 | Seoll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 선리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형분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유래]
원래는 북으로 장선리, 남으로는 대리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라고 하여 중리(中里)라고 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 마을이 소실되었다. 그 이후, 밀양 등지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다시 마을을 세웠고, 이것이 선리가 되었다고 한다. 선리(善里)라는 지명은 인근 장선리(長善里)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리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선창마을로도 불렸는데, 과거 조선시대까지 이곳에는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에 따라서 배가 대는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선창마을이라고 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산수가 좋고 지형이 배와 같이 생긴 곳에는 큰 인물이 난다고 하여 지명을 바꿔 ‘물 맛이 배 맛 같이 좋다’라는 뜻으로 ‘이천(梨川)’으로 바꿨다고 전하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선리마을은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선리 북쪽 끝에 있는 마을로 언양배내와 접경 지역이다. 선리마을은 중리(中里)와 장선리(長善里) 두 마을로 형성되었다. 1786년에 발간된 『양산군읍지』에서는 배내골 전체를 서면 이천리(梨川里)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기 하서면(下西面)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대리(大里)와 선리(善里)로 분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모여든 피난민으로 큰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리에 위치해 있던 전 마을이 소실되었고, 그 이후 밀양 등지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다시 마을을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리 지역에는 하류의 원동 지역과 통도사로 넘어가는 고개가 상류 선리 인근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삼국시대에 이미 주거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천태산이 수로대왕의 태를 묻어 천태산이 되었다는 일부 마을 주민의 구전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 더욱이 배내사거리라는 지형적 요인 및 밀양 단장면에서 하천을 따라 배내골로 들어서면 언양까지 뱃길이 이어져 고대부터 사람의 왕래가 대단히 빈번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러한 지형적, 교통적 요충지인 위치한 선리는 넓은 들판이 있는 대리와 인접한 곳이라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밀양댐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 되었고, 댐 건설로 인한 수위 상승으로 수량이 많아져 피서객으로 분비고 있다.
[자연환경]
마을은 주변은 모두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안으로는 배내천이 흘러 밀양댐으로 들어간다. 최근 밀양댐의 건설로 인하여 수위가 상승하여 호반의 도시와 같은 풍경을 제공하고 있는데, 배내골은 대리와 선리 일대 10㎞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천혜의 협곡이다따라서 뛰어난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많은 관광객이 피서를 즐기기 위해서 마을을 찾고 있다. 내포마을은 원동마을에서 배내골 방면으로 우회전을 하면 원동과 언양 가지산 지역을 잇는 69번 지방도가 나온다. 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배태고개와 대리마을, 금촌마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마을은 금촌마을에서 직진하다가 보면 선리교를 지나면 바로 그곳이다.
[현황]
2007년 12월 31일 현재 총 86가구에 17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선리마을 남서쪽으로 지방도 69호선이 지나고 있다. 배내골인 선리와 대리 일원 농민들로 구성된 고로쇠 작목반 있으며, 선리마을의 고로쇠 수액은 뛰어난 품질로 유명하여 해마다 배내골고로쇠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특히 선리마을은 봄이면 매화가 만발하여 장관을 이루며, 민간요법에 쓰이는 매실차 등 매실 관련 사업에 많은 주민이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