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3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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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代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영어의미역 | Ancient Times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im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고대/고대 |
집필자 | 이욱 |
[정의]
초기국가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순천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삼한시대]
순천 지역에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소국이 등장한 것은 삼한 시대부터이다. 순천 지역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 중 마한에 속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마한은 흔히 78개의 소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전라남도 동부 지역에서 마한 소국으로 비정되고 있는 곳은 세 곳이었다.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운국(不雲國), 초리국(楚離國)이 그것이다. 이들은 각각 전라남도의 순천 낙안, 보성 복내, 고흥 남양으로 비정되고 있다. 때문에 불사분사국이 현재의 순천 지역에 있던 마한의 소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낙안은 독립적인 군이었다. 때문에 현재의 순천시 중 조선시대까지 순천의 영역이었던 곳에는 마한의 소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이 시기 순천 지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나 대표적인 유적, 유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이와 관련하여 전라도 동부 지역에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현재까지 정밀한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와 같은 거대한 고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는 순천 지역이 마한과 깊은 연관이 있는 영산강 유역과는 비교적 관계가 없지 않나 추정할 수밖에 없다.
[가야와 운평리 고분군]
순천 지역이 삼국 중 어느 나라에 속했는가를 문헌 자료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삼국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 백제의 감평군[무평군, 혹은 삽평군]이었다는 『삼국사기』의 기사이다. 순천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편입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백제 성왕 대에는 백제의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백제가 군을 설치한 것이 백제 성왕 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천이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백제에 편입되기 이전 순천 지역에 독자적인 지역연맹체의 형성 여부, 신라나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몇 가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통해 가야와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순천 성산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고배(苦杯)와 호(壺), 순천 운평리 목곽묘의 수평구연호(水平口緣壺), 순천 용당동과 죽내리 석곽묘의 고배와 대부직구호(臺附直口壺) 등은 모두 소가야계의 토기들이고, 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의 것들로 편년되고 있다. 특히 순천 운평리 목곽묘에서 출토된 수평구연호는 서부 경남의 출토품과 전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같다. 이를 보면 5세기 전반에서 후반까지 순천 지역은 일시적으로나마 소가야연맹체에 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6세기 전반으로 가면 출토유물이 달라지고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대체로 대가야계의 유물이 대거 출토되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순천 운평리 유적이다. 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는 3차에 걸쳐 운평리 고분군을 발굴 조사하였다. 순천 운평리 고분군은 백제가 ‘전남동부권’을 장악하기 직전인 기원후 500년을 전후한 시기의 순천 지역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체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의 것들로 대가야계 금귀걸이와 마구류(馬具類), 가야계 토기와 큰 칼, 옥 등이 출토되었다. 1·2차 조사 당시 출토유물도 3차 발굴조사와 유사해 대가야계 토기류, 장신구, 마구류가 주류를 차지했다.
이 조사 결과는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 번째는 5세기 전반까지 소가야와 관련을 맺던 순천 지역이 5세기 후반에는 대가야 중심 후기 가야연맹 소속국이 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5세기 초 이후 낙동강 하류 지역은 신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가야제국은 섬진강을 통해 대외교역을 하였다. 때문에 대가야가 이쪽으로 적극적으로 진출하였다. 그런데 섬진강 동안보다는 섬진강 서안 쪽에서 대가야계 유물이 더 많이 나오고 있다. 이는 순천 지역이 영산강 유역이나 경남서남부 지역과 달리 5세기경까지 독자적으로 지역연맹체를 형성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대가야계 세력이 비교적 쉽게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대가야계와 현지 토기 양식이 공존하는 것은 대가야의 중심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가야 중심집단으로부터 독립적인 자치권이 보장된 지역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을 반박할 수 있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라는 점이다.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임나’는 가야를 일컫는다. 그리고 『일본서기』 계체기 6년(512)조에 ‘임나사현을 백제에 양도했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자료를 뒤집어보면, 백제가 차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임나의 영역이었다는 의미이다. 한때는 임나사현을 다른 지역에 비정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재는 임나사현을 전남 동부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임나사현 중에서 사타국은 지금의 순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점자 인정되고 있다. 때문에 운평리 고분군은 사타국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일본계 토기나 유물은 전혀 보이지 않고, 대가야계 유물이 대거 발굴되었다. 따라서 임나사현은 임나일본부와 무관한 가야와 관련이 있는 네 지역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고, 나아가 임나일본부가 일본의 지배 기구였다는 주장이 허구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제와 사평군]
『일본서기』 계체기 6년(512)조에 ‘임나사현을 백제에 양도했다’라는 기사의 내용을 전제로 한다면, 512년(무령왕 12)에 순천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백제 성왕 21년~22년(544) 사이에 순천에 감평군[무평군, 혹은 삽평군]이 설치되었다. 성왕은 신라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임나(任那)의 하한(下韓)에 군령(郡令)과 성주를 설치하였다. 모두 37개 군현을 5방의 관할 하에 두었다. 그 가운데 지금의 전라남도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하는 곳은 남방[지금의 광주광역시]이었다. 그리고 남방이 관할하는 군 중의 하나로 감평군(欿平郡)이 설치되었다. 나중에는 남방이 무진주로 개칭되었다.
[남북국 시대]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도 감평군[삽평군]으로 유지되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당의 제도를 따라 주·군·현간 영속 관계를 강화하고 동시에 전국에 걸쳐 모든 지명을 중국식 한자명으로 고쳤다. 그에 따라 무주총관부의 관내에 들게 된 감평군은 승평군(昇平郡)으로 개칭되었다. 승평군은 승주군(昇州郡)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천은 군으로서 주변의 해읍현(海邑縣), 희양현(晞陽縣), 여산현(廬山縣)을 관할하였다. 해읍현은 백제 때 원촌현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여수이고, 희양현은 백제 때 마로현으로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이며, 여산현은 백제 때 돌산현으로 지금의 여수 돌산에 해당된다.
757년에 시행했던 지방 제도 개편은 무열왕조가 지배권을 유지하려는 방편으로 추진했던 중국화 정책이었고, 지방통치의 강화를 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776년(혜공왕 12)에 정식으로 철회되었다. 그러나 순천에 사용했던 ‘승평군’이라는 명칭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까지도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덕왕의 조치가 실패로 돌아간 것은 결국 신라의 지방지배가 한계를 보인 것이다. 이후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떨어진 지역에서 반신라적인 세력, 이른바 호족세력이 등장하였다. 전라남도에서도 호족이 출현하였는데, 섬진강 수계에 속하는 순천 지역은 견훤(甄萱)의 후백제에 귀부하였다. 이는 견훤이 순천을 근거로 세력을 키워갔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견훤은 순천의 호족을 우대하였다. 순천 호족을 대표하는 두 세력 중 김총(金摠)은 인가별감이었고, 이는 견훤의 친위부대 지휘관을 의미했다. 한편 박영규(朴英規)는 견훤의 사위가 되었다. 그만큼 박영규의 세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영규가 힘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순천이 지닌 지리적 이점과 시대 상황이 작용하였다. 순천은 물산이 풍부한 섬진강 수계의 주요 거점으로, 내륙 수운을 통해 보성과 곡성, 구례까지 직접 연결되었다. 순천 남쪽은 바로 바닷가로 이어지는 천혜의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현 순천시 홍내동 인근의 사비포(沙飛浦)에 조창을 설치했고, 조선시대에는 현 순천시 해룡면 해창리에 조창이 있었다. 순천의 남쪽 해안 지대가 전통시기 한국의 연안 해상교통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였다. 게다가 박영규가 활동하던 이 시기는 한국의 전근대 역사에서 해상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때문에 순천에서는 해상활동에 종사하던 세력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며, 박영규가 그러한 세력을 대표했던 존재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따라서 순천의 지리적 여건을 발판으로 해상 무역 등의 활동을 통해 세력을 구축한 호족이 등장하여,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극복하는 주역의 한 사람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