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0531
한자 世居地
영어공식명칭 Residential Plac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우일

[정의]

경기도 시흥시에서 특정한 성씨가 모여서 대대로 살고 있는 곳.

[개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김(金), 이(李), 박(朴) 등 혈연에 기초한 성을 사용하였지만 일반화되지는 않았고 차츰 중국의 성씨 제도를 수용하면서 고려 초기부터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왕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賜性)을 비롯하여 모성(冒姓), 변성(變姓), 자칭성(自稱性) 등의 방법으로 성씨가 나뉘어 갔고, 지역적 연고를 배경으로 토성(土姓) 등이 일정한 지역에 터전을 잡으면서 성씨 체계가 확립되었다.

[시흥 세거지의 특징]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택리지』에서 “수리산에서 나온 맥 중에 서쪽으로 간 것이 가장 짧은 맥이며 안산 바닷가에서 그쳤는데, 서울 공경가(公卿家) 조상들의 무덤이 많다. 서울과 가깝고 생선과 소금이 풍부하여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집도 많다.”라고 시흥과 그 주변 지역의 특성을 언급하고 있다.

향촌인 시흥 지역은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과 가깝고 수로 교통을 이용한 상업적인 부유함과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농장 운영으로 중앙 정계의 유력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거점으로 이 지역을 활용하였다. 이들은 시흥에 세거 터전을 마련하고 거주하며, 가문이 현달(顯達)하면 한양으로 옮겨갔다. 또한 향촌은 집안의 묘역, 정치적 피신처, 경제적 토대 역할을 수행하면서 동족 마을의 형태로 여러 대에 걸쳐 거주하는 세거지가 되었다. 그리고 유력 집안은 아니지만 주요 성씨들이 오랫동안 세거하면서 지역에 뿌리를 내린 성씨도 많았다.

[시흥의 주요 성씨와 세거지]

조선 초에 하연(河演)을 입향조로 하며 소래산 아래 신천동 계란마을에 세거해 온 진양 하씨(晋陽河氏)와 강순덕(姜順德)을 입향조로 하며 하상동 하직골에 세거해 온 진주 강씨(晉州康氏)가 대표적이다. 이후 성완(成玩)을 입향조로 하는 창녕 성씨(昌寧成氏)미산동 구시미, 류수천(柳壽千)을 입향조로 하는 문화 류씨(文化柳氏)능곡동 능골, 한준겸(韓浚謙)을 입향조로 하는 청주 한씨(淸州韓氏)거모동 거무개, 권만형(權曼衡)을 입향조로 하는 안동 권씨(安東權氏)하중동 벼슬구지, 장옥(張玉)을 입향조로 하는 덕수 장씨(德水張氏)장곡동 매꼴, 박동량(朴東亮)을 입향조로 하는 반남 박씨(潘南朴氏)군자동 산뒤, 윤승류(尹承柳)를 입향조로 하는 파평 윤씨(坡平尹氏)가 산현동 깨골에 각각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이들 집안 이외에도 거의 1마을 1족 형태의 동족이 세거해 온 집성촌이 많이 존재한다. 계수동 수노골대야동 대골의 경주 이씨(慶州李氏), 금이동 도리재의 평산 신씨(平山申氏), 도창동 강챙이의 밀양 박씨(密陽朴氏), 매화동 매체기의 강릉 함씨(江陵咸氏), 미산동 옛터골의 연일 정씨(延日鄭氏), 방산동 다지골의 추계 추씨(秋溪秋氏), 포동 새우개의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석동 둔터골의 정선 전씨(旌善全氏), 물왕동 안말의 진천 송씨(鎭川宋氏), 조남동 남왕의 김해 김씨(金海金氏), 하중동 성마루의 인동 장씨(仁同張氏), 군자동 구지정의 밀양 당씨(密陽唐氏), 월곶동 고잔의 순흥 안씨(順興安氏), 장현동 두일안동 권씨(安東權氏), 정왕동 높은우물원주 원씨(原州元氏) 등이 있다. 이런 시흥의 주요 세거 성씨와 세거지는 1980년대 이후 산업화 및 도시화와 함께 거의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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