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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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亮臣墓 |
영어공식명칭 | Tomb of Lee Yangsi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죽율동 592-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창현 |
조성 시기/일시 | 1739년 - 이양신 묘 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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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 시기/일시 | 1802년 - 이양신 묘비 건립 |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 1689년 - 이양신 출생 |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 1739년 - 이양신 사망 |
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죽율동 592-3 |
원소재지 |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죽율리 댐마을 |
성격 | 묘소 |
양식 | 원형 합장 단분 |
관련 인물 | 이양신 |
[정의]
경기도 시흥시 죽율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양신의 묘.
[개설]
이양신(李亮臣)[1689~1739]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원량(元亮), 초명(初名)은 종신(宗臣)이다. 아버지는 이조참판 이희조(李喜朝), 어머니는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의 딸이다. 문음(門蔭)으로 관직에 진출한 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을 역임하고, 1727년(영조 3)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이 되었다. 그 당시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집권한 이광좌(李光佐) 등을 탄핵하다 유배된 후 방면되었다. 1738년(영조 14) 사복시정(司僕寺正) 재임 중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저서로 『대간공유고(大諫公遺稿)』가 있다.
[위치]
경기도 시흥시 죽율동 592-3에 있으며 한배미마을 생금집[시흥시 향토유적 제7호]의 좌측 언덕에 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변천]
처음에 안산군 마유면 죽율리[지금의 시흥시 죽율동] 댐마을에 있다가 시화지구가 개발되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장되었다.
[형태]
묘는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와 합장묘로 단분(單墳)이다. 묘역에는 상석·향로석·망주석 등의 석물과 묘표(墓表)가 건립되어 있다. 높이 1.78m의 망주석에 가늘게 조각한 호랑이 문양[細虎]이 새겨져 있고, 상석과 향로석에는 문양을 장식하지 않았다.
[금석문]
1802년(순조 2) 묘비가 세워졌다. 묘비는 네모난 기단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의 개석(蓋石)을 올린 양식이다. 묘비의 높이는 2.09m, 비신의 높이는 1.23m이다. 비신 전면에 '유명조선 대사간 이공량신지묘 부인평산 신씨 부(有明朝鮮大司諫李公亮臣之墓夫人平山申氏祔)'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대제학 조관빈(趙觀彬)이 짓고, 손자인 경기도관찰사 이시원(李始源)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