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6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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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碩文 |
영어공식명칭 | I Seokmun |
이칭/별칭 | 사실(士實),돈재(遯齋),북비공(北扉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진갑곤 |
출생 시기/일시 | 1713년 - 이석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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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39년 - 이석문 권무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762년 - 이석문 무신 겸 선전관 발탁 |
몰년 시기/일시 | 1773년 7월 27일 - 이석문 사망 |
출생지 | 이석문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 |
거주|이주지 | 이석문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한개 마을 |
묘소|단소 | 이석문 묘소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성산(星山) |
대표 관직 |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성산(星山). 자(字)는 사실(士實), 호는 돈재(遯齋). 고조할아버지는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이수성(李壽星)이다. 할아버지는 이달한(李達漢)이고, 아버지는 이이신(李爾紳)이다. 어머니는 첨사(僉使) 송원기(宋遠基)의 딸이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산 이석구(李碩九)[1721~1785]와 사촌이나 이석문(李碩文)[1713~1773]은 남인(南人), 이석구(李碩九)는 노론(老論)으로서 붕당이 달랐다.
[활동 사항]
이석문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대포(大浦)[한개 마을]에서 태어나 살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으로, 1739년(영조 15) 권무과(權武科)에 급제한 후 선전관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장헌 세자(莊獻世子)[사도 세자]가 대리할 적에 의금부도사가 되었으나, 간사한 무리들이 사도 세자를 흔들 기미가 있자 분개하여 벼슬할 뜻을 잃고 병마절도사 제수를 거절한 채 성주로 돌아왔다. 1762년(영조 38) 봄에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윤오월에 사도 세자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휘녕전(徽寧殿)에서 어가(御駕)를 모셨는데 간하는 자는 죽이겠다는 엄명에도 세손을 업고 들어가 사도 세자의 구명(救命)을 꾀하였고, 큰 돌을 들어 뒤주 위에 올리라는 명도 거역하여 곤장 50도를 맞고 파직되었다.
귀향 후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는 사촌 아우 이석구 집에 노론 인사들이 드나들므로 시류에 편승하는 자들을 마주하기 싫다며 사립문을 북쪽으로 옮기니 세상에서 그 문을 ‘북비(北扉)’라 불렀다. 이에 이석문은 북비공(北扉公)으로 알려졌다. ‘돈재(遯齋)’라는 편액을 내걸고 은자의 삶을 살던 중 영조가 지난 일들을 뉘우치고 다시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에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유유자적하며 지내다가 1773년(영조 49) 7월 27일 사망하였다. 1795(정조 19)에 손자 이규진(李奎鎭)이 알성시에 장원하자 정조가 “네 할아버지가 세운 공이 가히 아름답다.”라며 눈물을 보였고, 경연(經筵)에서 채제공(蔡濟恭)[1720~1799]을 대하고는 북비가 아직 있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묘소]
묘는 경상도 개령(開寧) 부상역(扶桑驛)[현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부상리] 백련암(白蓮庵) 왼쪽 기슭 동향 언덕에 있다.
[상훈과 추모]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1899년(고종 36) 장헌 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숭하자, 고종이 이석문의 충성을 표창하여 사당에 지방관을 보내어 제문을 드리고 제사를 올리도록 하고, 이석문의 6세 주손(胄孫)[맏손자]을 효릉 참봉에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