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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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Beautiful Neunggang-ri Where the Silky River Flows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수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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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4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7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9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5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7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6년 |
산 | 금수산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샘 | 얼음골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사찰 | 정방사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내원암 |
나루 | 도화리 선착장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도화리 |
마을 | 시로골 |
숙박 시설 | ES리조트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전시관 | 능강솟대문화공간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
공원 | 능강 야생화 단지 |
[개설]
청풍교에서 단양 방면으로 청풍호를 끼고 있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10여 분쯤 달리면 도화리가 나온다. 이곳을 지나쳐 산중턱에 자리 잡은 고급스런 ES리조트에서 조금 더 가면 호젓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에 도착한다.
능강리는 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강변 마을이다. 마을 앞으로는 넓고 잔잔한 청풍호수가 펼쳐져 있고, 뒤편으로 기암괴석과 노송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금수산(錦繡山)이 자리하고 있다. 능강리는 ‘능강’ 또는 ‘능강동’으로 불리며 제천시 청풍군 동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능강리로 금수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17년 금성면 지역이 되었다가 1929년에 수산면으로 최종 편입되었다. 옆 마을 청풍면 도화리와는 면의 경계를 이룬다.
[다시 돌아온 마을 사람들]
‘능강리’라는 마을 이름과 관련해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 온다. 첫 번째는 강 옆에 위치한 마을이라 ‘언덕 능(陵)’에 ‘물 강(江)’ 자를 써서 ‘능강’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과거 마을 앞을 흐르는 남한강의 강물이 흡사 비단결과 같이 아름답다 하여 ‘비단 능(綾)’에 ‘물 강(江)’ 자를 써서 ‘능강’이라 했다고도 한다. 제보자 원종한의 기억에 따르면 마을의 일부가 물에 잠기기 전 석양이 강물에 비칠 때면 마을의 강변 풍경은 정말 황홀했다고 한다. 김연호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제천지부장은 『풍경 있는 청풍호』에서, 수몰 전 금수산 자락의 능강동을 오르는 15리의 강변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 후기 문인 옥소(玉所) 권섭(權燮)[1671~1759]은 자신이 죽어서도 바라보고 싶은 곳으로 능강을 꼽으며, “능강에 살어리랏다”라고 시로 표현하기도 했다.
능강리는 한양지(寒陽地), 본동(本洞), 시로골, 논골, 숫모기 등 5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서쪽에서부터 능강계곡이 있는 곳이 일명 얼음골 한양지다. 한양지 앞으로 수몰된 지역이 과거 능강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던 본동이다. 한양지에서 조금 동쪽으로 이동하면 능강솟대문화공간과 마을 자랑비 뒤로 주택이 모여 있는 시로골이다. 시로골의 옆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이 논골이다. 논골에서 조금 내려가면 과거 금산초등학교가 있던 숫모기다.
1984년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능강리 주 마을인 본동은 전체가 수몰되었고, 한양지와 시로골, 논골, 숫모기도 일부 수몰되어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면서 능강리는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미거주 지역이 되었다. 수몰 이후에도 마을을 떠날 수 없었던 일부 주민들은 현 ES콘도와 능강교 사이의 내원암 터 가건물에서 임시로 거주했다가 도화리 선착장에서 몇 년 생활하였다. 그리고 1990년에 현재 시로골에 마을을 조성해서 재정착하면서 능강리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행정 업무가 재개되었다. 능강리 주민의 기억을 더듬어 수몰 이후 마을 재건과 이후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수몰 전후의 마을 생활]
능강리 주민들은 본동과 숫모기에 있던 두 곳의 나루를 통해 남한강 건너 지곡리와 수산면 소재지를 오고갔다. 수몰 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목선을 타고 남한강을 건너 통학했다. 물이 불어나면 배 안으로 물이 들어올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강을 지나갔다. 비가 많이 내려서 강물이 불어나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수업을 하는 동안 물이 불어나면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나루터에 있는 가마바위가 잠기면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수산면 소재지의 경우 과거에는 강물을 건넌 뒤에 조금만 걸어가면 쉽게 갈 수 있었으나, 수몰된 이후에는 다리를 이용해서 빙 둘러가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리고 나루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강 건너 지곡리와는 왔다 갔다 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수몰 이후 마을 사람들은 다리를 이용해 건너편 지역과 교류하고 있다. 장을 보거나 병원 등을 갈 때는 제천 시내로 나가고, 금융 업무의 경우 대개 농업협동조합을 이용하기 때문에 면소재지인 수산리로 간다. 제천 시내로 나가는 대중버스는 아침, 점심, 저녁 하루 3번 다니는데, 1시간 정도 걸린다.
능강리에는 흔히 마을에 하나씩은 있는 마을회관과 가게가 없다. 2000년대 중반 김재춘이 이장을 맡아 볼 때 회관을 지으려고 노력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무산되었다. 능강리 주민들은 의외로 가게가 없는 것이 그리 불편하지 않다고 말한다. 가게를 대신하는 생활 용품과 식료품을 실은 만물차가 일요일을 제외하고 하루 한 번씩 마을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손쉽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차는 청풍면과 수산면 일대 마을을 돌며 배추, 콩나물, 북어, 과자, 수세미 등 식료품과 생활 용품 일체를 팔아 ‘만물차’라고 불린다. 능강리에는 보통 오전 11시에 도착한다.
[충주댐 건설로 물에 잠긴 마을들]
1985년에 이루어진 충주댐 건설로 자신이 나고 자란 삶의 터전이 수몰된다는 것에 대해, 능강리 주민들은 무슨 반대나 이유를 달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라에서 추진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보여 주는 단편적인 것이, 수몰된 곳의 조상 묘에서 뼈를 수습해 화장하면서, 불이 들어갈 때 “어명이요!”라고 외쳤다는 사람들의 구술이다. 어명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삶을 간직한 마을을 물속에 묻고 조상들의 뼈가 묻힌 고향을 군소리 없이 떠났던 것이다.
능강리는 높이 145m 이하의 마을은 모두 수몰되었다. 살던 집과 농사짓던 논과 밭이 그대로 물에 잠겼고, 서낭당과 곳집 등 마을의 전통 문화가 모두 물 아래로 들어갔다. 수몰 지역에 대한 보상은 간접 보상과 직접 보상으로 나뉘었다. 물에 직접 잠기는 곳은 직접 보상으로 100% 보상이 이루어졌다. 직접 물에 잠기는 것은 아니라도 영향을 받는 주민의 경우 간접 보상 대상자가 되었는데, 간접 보상자의 경우 해당 지역에서 거주하지 않고 이주를 하겠다고 동의하면 직접 보상민과 같이 100%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능강리에 다시 살기 위해]
능강리가 수몰된 이후에도 고향에서 계속 살기를 원했던 주민들은 능강천 다리 부근, 현재 큰 돌탑이 쌓여 있는 내원암 자리에 가건물을 짓고 한동안 거주했다. 마을주민들은 다시 능강리에 집을 짓고 거주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원래는 내원암 임시 거주지에 허가를 얻어서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당시 이장을 보던 이가 주택 건립을 추진한다면서 주민들의 인감을 찍어 갔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간접 보상금을 타기 위해, 가건물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닌 정착을 포기하고 이주하겠다는 포기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지속적으로 시청을 찾아가 잘못된 점을 지적했으나, 서류가 그렇게 들어간 것이라 어쩔 도리가 없다는 답변만 들었다. 답답했던 주민들은 청주에 있는 충청북도청도 찾아가고, 청와대에도 탄원서를 넣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청과 지속적으로 실랑이를 벌이던 중 도화리 선착장 쪽으로 이주하면 주택 허가를 내주겠다고 하자, 주민들은 그쪽으로 이주하여 한동안 거주했다. 하지만 도화리 주민들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도화리와 능강리 주민의 성격이나 주민회의 문화가 달라 여러 갈등이 터져 나왔다. 가장 큰 문제는, 과거 수산면에 속해 있던 능강리 사람들이 도화리로 옮기게 되면서 청풍면에 속하게 되자,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수산면 금수산의 송이 채취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불거지자 주민들은 다시 능강리에 살기 위해 방책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국회의원 선거철이 되었고, 이때 한 후보가 주민들에게 일단 집을 지으라고 말했다. 뒷일을 알아서 처리해 줄 듯한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그 말만 믿고 그 후보자를 지지하면서 시로골 근방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능강리를 지키고자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에 별도의 조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함께 돈을 모으고, 함께 힘을 모았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 불법으로 산을 밀었다고 벌금을 내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런 와중에서 마을 대표 몇 명이 시청으로 가서 마지막이라고 애원하면서 원본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청하여 살펴보니, 주민 동의서와 달리 맨 앞에 위치한 거주 포기서만 다른 철끈으로 따로 묶어져 있었다. 이것을 보고 주민들은 전 이장이 자신들의 동의서를 포기서로 조작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 결국 제천시청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건축 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었고, 1990년 능강 사람들은 다시 능강리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능강 사람들은 오랜 시간 능강리에 정착하는 문제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벌금을 무는 등 돈을 많이 소비해서, 막상 본격적으로 집을 지을 때는 자금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마을에 재거주하기 위해 틈만 나면 관청에 찾아가 따졌기 때문에 관에 밉보여, 농어촌주택건설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국민주택대출을 받아 집을 지어야 했다. 농어촌주택건설 보조금에 비해 국민주택대출금은 이율이 더 높고 원금 상환 조건이 좋지 않았다. 결국 집을 지은 후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이들은 외부 사람들에게 집을 팔고 나가야 했다.
제천시 수산면 능강리 산6번지를 밀어서 지었던 시로골 10여 채의 경우, 계단식으로 구획하여 다섯 집과 다섯 집이 마주보며 일렬로 배치되었고, 모두 양옥으로 잘 지었다. 평균적으로 당시 건립하던 주택들에 비해 잘 지어서 서울 사람들이 별장으로 집을 짓는 거라는 소문이 퍼져 경찰들이 조사를 나오기도 했다. 김재춘에 따르면 당시 형사가 집에 들어와 방에서 식구 한 사람씩 독대하며 조사를 했다고 한다. 이로서 주민 미거주 지역으로 말소된 능강리는 1991년 8월 5일자로 마을이 재형성되어 다시 대동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은 논골과 시로골 근방에 자리를 잡았고, 3년 뒤부터는 외지 사람들도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는 마을]
수몰 전인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능강리는 본동에 60여 가구, 한양지와 숫모기에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능강리 주민의 대다수는 마을을 떠나 주로 서울과 경기, 청주, 충주, 제천 등 인근으로 이주했다.
2007년의 자료에 의하면 능강리에는 40호, 83명이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춘에 따르면 현재 능강리에 거주하는 인구는 시로골 11가구, 논골 14가구로 25가구 정도이고, 인구는 60여 명 정도 된다고 한다. 이중 원종한, 정운석, 문기만, 김재국, 김재춘, 김재영, 정용배 등 일곱 집은 능강리 원주민이었으나 2010년에 정운석이 사망하고 문기만이 병환으로 제천 시내로 나가면서 현재 원주민은 다섯 집만 남아 있다. 그 외는 모두 외지에서 들어온 이주민이다.
이 외지인들 대부분은 은퇴 이주민들로, 노후 생활 및 전원주택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능강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청풍호로 인해 해발고도가 높아진 능강리는 금수산뿐 아니라 청풍호의 풍광이 더해지고 시야가 트이면서 예전보다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이는 외지인들의 시선을 더욱 붙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외지에서 들어온 이주민들과 원주민들 간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다. 은퇴 이주민의 경우 자신들의 과거가 대단했다고 여겨 원주민들을 조금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각자의 곳에서 다른 삶을 살다 왔기에 이주민들 간에도 교류가 활발하지 않다. 그런데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원주민 간에도 서로 견제가 심하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2000년대 마을에서 몇 가지 농촌 지원 사업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몇 집만 덕 본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도 그런 모습으로 상황이 돌아가자 무슨 일만 있어도 오해하고 의심하여 주민들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안타깝게도 원주민 간에 서로 경찰에 고발하는 사태로까지 일이 악화되었다고 했다.
이러다 보니 마을의 공동체 모임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리가 없다.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정월 대보름 윷놀이 대회를 비롯해 매년 연말에 행해지던 대동회도 2010년에는 열리지 않았다. 원주민과 이주민 간의 조화도 이루어지지 않은데다 원주민들 간의 불화까지 겹쳐지면서, 안타깝게도 현재 능강리에서는 전통적인 농촌의 연대와 나눔의 문화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송이 채취에 대한 기대]
수몰 전 능강리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다. 논농사보다는 밭농사 위주로 이루어졌다. 주로 고추와 콩, 조 등의 경작이 이루어졌는데, 고추의 경우 인근 마을에 비해 일찍 시작하여 1970년대의 경우 다른 농산물에 비해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수몰 전 전체 농경지는 논이 15만 4,000㎡, 밭이 92만 9,000㎡였다. 수몰로 인해 논이 전부 사라졌고, 쓸 만한 밭도 대부분 물에 잠겨 이전에 비해 농업의 규모는 매우 작아졌다. 집들이 들어선 곳은 과거에 모두 밭으로 쓰였던 곳이라 그만큼 경작지가 줄어든 셈이다. 현재 밭농사가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토지는 원래 임야로 등록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농사를 짓더라도 우선은 집에서 소용되는 것은 놔두고 남은 것은 시장에 내다판다. 보통 고추, 콩, 율무, 수수, 팥, 참깨, 들깨 등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의 젊은 층은 대개 마을 밖으로 출퇴근하면서 건축업에 종사하고 있다. 현재 전 가구가 민박을 할 정도로 능강리에서는 관광과 민박업 비율이 높다. 식당은 모두 네 곳으로, 매운탕집 두 곳과 일반 음식점이 두 곳이다. 숙박업은 펜션과 민박 형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여름철에 피서지로 알려진 능강계곡과 얼음골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고 있어, 여름철에는 민박으로 부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몇 해 전 충청북도에서 지원을 받아 민박을 하는 집들의 화장실 공사와 심야 보일러 교체 공사가 이루어졌다.
민박과 펜션업은 한철 장사여서 주민들은 또 다른 부업으로 양봉을 하고 있다. 능강리의 경우 벌에게 설탕을 전혀 먹이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그 양이 매우 적어서인지 품질이 좋다고 한다. 생산량은 많지 않아도 다른 마을 꿀보다 좋은 값에 팔리고 있어서 좋은 부업거리가 된다. 마을을 지나가다 보면 꿀 판매 알림판을 쉽게 볼 수 있다.
능강리에서는 매년 9월이면 송이 채취로 바쁘다. 송이 채취는 길면 30일 정도, 짧으면 20일 정도 이루어진다. 주민들은 송이 채취가 시작되기 전 능강계곡 산제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산신제는 이장이 제주가 되어 제수를 마련하고 제사를 진행한다. 이장이 대표로 한 잔을 올리고, 그 다음에 마을 최고 연장자가 술잔을 올린 뒤에 일동 재배하고 제사를 마친다. 축은 읽지 않으며, 소지 올리기는 행한다. 산신께 송이를 채취하는 기간에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치게 해 주고,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길 빈다.
금수산의 소나무는 그 생김새가 매우 빼어나다. 1970년대 후반부터 솔잎혹파리 방제가 일찍 이루어져 소나무의 상태가 매우 좋은데, 그 덕분인지 소나무 아래에서 송이가 많이 생산된다. 바위가 많은 금수산의 송이는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모양은 예쁘지 않다. 대부분이 작고 뒤틀려 있으나 향은 다른 어느 지역 송이와 달리 매우 진하다.
과거에는 전량이 일본으로 수출되어 산림조합에서 생산량의 전체를 수매했으나, 근래에는 국내에서 소비가 많이 이루어져 산림조합 수매와 개인 판매가 함께 이루어진다. 조합을 거치는 것보다 개인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수익이 더 좋아서, 판로가 있는 이들은 개인 판매의 비율이 높다. 과거 산림조합에서 수매할 때는 참여 가구 수에 따라 수익을 배분했으나, 근래에는 참여한 사람 수에 따라 이루어진다.
송이를 채취하는 날이면 주민들은 새벽 일찍 산으로 출발하여 오후 2시까지 송이를 채취한다. 송이 채취자 중 몇몇은 교대로 남아 채취 구역에 무단으로 들어가려는 타 지역 사람들을 감시한다. 금수산의 송이는 수산면 능강리와 상천리, 하천리, 도화리 네 마을이 구역을 나눠 채취한다. 그런데 단양 쪽의 외부 사람들이 송이를 따기 위해 몰래 들어오는 통에 매년 문제가 불거지고 싸움으로 번져서 마을 사람 모두 골치를 앓고 있다.
능강리에서는 9월에 이루어지는 송이 채취가 가계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한 사람이 송이를 따기 위해 하루 산에 가면 최소 20만 원은 벌고, 생산량이 많을 때 가족이 부지런히 산에 다니면 많게는 3,000만 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송이의 생산량에 따라 능강리의 경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송이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기대는 높을 수밖에 없다.
[마을에 들어선 시설들]
수몰 이후 능강리에는 ES리조트, 능강야생화단지, 능강솟대문화공간이라는 현대적 시설이 들어섰다. 주민들은 마을 내에 현대적인 시설이 들어서는 것에 대해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시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못한 편이다.
능강리 입구에 있는 ES클럽은 회원 전용 고급 리조트로, 청풍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 있어 전망이 매우 좋다. 리조트 사장 이종용은 1970년대 후반 제천시를 방문했을 때, 충주댐 건설에 대한 계획과 함께 제천시에서 능강리 주민들의 이주 후 마을 뒷산을 팔고 싶어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수심 150m의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면 전망은 다시 없이 좋을 것이란 판단이 서자 그는 금수산 자락 33만 578.51㎡[10만 평]를 구입했다. 그리고 1994년 리조트 건설을 시작해 1997년에 개장했다. 마을에 리조트가 들어온다고 했을 때 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매우 거셌는데, 리조트가 건립된 이후에도 마을과의 관계는 여전히 좋지 않은 편이다.
2002년 제천군에서는 능강리 시로골 서쪽에 기린초 외 36종 3만 1,350본의 야생화를 식재하여 능강야생화단지를 조성하였다. 그 옆으로는 산책로와 쉼터도 만들었다. 하지만 홍보도 미흡한데다 사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대다수의 야생화가 고사되었거나 유실되었다. 더구나 제천시장이 바뀌면서 주민이 몇 되지 않은 능강리보다 인구가 많은 의림지 쪽의 표심을 의식해 그쪽으로 새로운 야생화 단지를 추진한 이후에는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능강야생화단지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자, 야생화 단지의 쉼터 자리에 능강솟대문화공간이 들어왔다. 이곳은 국내 최고의 창작 솟대작가 윤영호가 20여 년간 현대적인 조형물로 제작한 솟대들이 가득한 국내 유일의 솟대 테마 공원이다. 솟대 문화 공간이 들어온다고 했을 때도 주민들은 반대했다. 당시 이장과 주민 몇몇이 이것이 마을의 색다른 볼거리, 문화 공간으로 자리하여 외부인들의 발길을 이끌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꿈에서 만나는 옛 마을]
능강리 주민 원종한은 충주댐 건설 이후 마을에서 들리던 강물 흐르는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생각이 잘 나지 않으나, 가물 때 호수 물이 줄어들어 과거 본동마을의 모습이 살짝 드러나면 특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고 했다. 김재춘도 “잠겨 있으면 모르겠는데, [물 사이로] 옛 모습이 보이면 생각이 많이 난다. 지금 보면 다 잠겨 있는데 허망하다. 본동에서 마을 이웃 간에 나눈 정이 많이 그립다.”고 말했다.
김태옥은 개인적으로는, 집을 양옥으로 새로 지어 생활하고 살림하는 게 편해져서 한편으론 수몰된 것이 잘되었다는 생각도 하지만, 신기하게도 잠자리에서 꿈을 꾸면 언제나 본동 옛 마을에 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 넋을 놓고 청풍호를 바라보고 있으면 본동에서 살았던 시절이 생각난다고 했다. 김태옥의 남편 원종한은 2006년 오토바이 사고로 장애를 입어 거동이 불편한 상황인데, 사고 이후 그 역시도 부인과 같이 본동의 옛집 사랑에서 자고, 마루에 나가 강을 바라보는 꿈을 꾼다고 말했다. 능강리의 원주민들은 고향의 기억 또한 청풍호 아래로 묻어 버리고, 마른날 드러나는 물속의 잔해들에서 간간히 고향을 기억을 더듬으며, 꿈에서나 친근한 과거와 조우하고 있는 듯했다.
과거 능강리는 비단 같은 강물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살던 강변 마을이었다. 지금도 능강리는 금수산과 청풍호 사이에 자리한 마을로 여전히 아름다우나 고향을 물속에 묻어 버린 아픈 기억까지 물에 묻고 살아가는, 농촌의 정(情)이 말라 버린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워 보이는 호젓한 호숫가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