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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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殊寺木造如來坐像 |
영어공식명칭 | Wooden Seated Buddha of Iksan Munsusa Temple |
이칭/별칭 | 익산 문수사 목조여래좌상,문수사 목조불좌상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천호산길 140[호산리 69] 문수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안여진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문수사 극락전에 있는 조선 후기 불상.
[개설]
문수사(文殊寺) 극락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여래좌상(木造如來坐像)은 원래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1997년 극락전을 신축하면서 이전하였다.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은 2002년 12월 14일 익산시 향토유적 제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여래좌상의 좌우 협시보살은 최근에 제작한 것이다. 목조여래좌상은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혀 있다. 착의법은 편삼을 착용한 이중착의법이며 아미타 수인을 결하고 있는 아미타불좌상이다.
목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문수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문수사는 1961년 당시 주지였던 김종대(金鐘大)가 건립한 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시대인 881년(헌강왕 7) 혜감대사(慧鑑大師)가 창건하였고 조선 초기에 함허대사(涵虛大師)가 중건하였으며, 19세기에 허주대사(虛舟大師)가 중수한 거찰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승려 금엽(金葉)이 절을 중수하였으나 이후 많이 퇴락하여 1965년 승려 김종대가 당시 군수였던 조영호(調榮浩) 등 여러 신도들의 시주로 대웅전과 명부전 등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은 1990년대에 새롭게 건립하였다. 문수사가 인근의 천호산 아래에는 백운사(白雲寺)와 백련암(白蓮庵)이 있는데, 문수사는 문수보살의 도량, 백운사는 보현보살의 도량, 백련암은 관음보살의 도량으로 전해 오고 있다.
[형태]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은 금색으로 도색되어 있으며, 얼굴 폭이 넓고 살이 오른 정사각형의 상호는 근엄한 형태로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이고 있는 자세이다. 머리는 소라형의 나발이며 육계와 머리의 경계는 거의 없으며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눈은 아래를 향해 살짝 내려 뜬 모습이며, 입술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어 전체적으로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다. 법의는 편삼을 착용한 이중착의법으로 매우 두껍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쪽 어깨에서 가슴에 걸친 옷자락은 어깨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른 주름과 가슴 쪽으로 폭넓게 흘러내린 주름이 합쳐져 있다. 가슴으로 내려진 옷의 끝자락은 타원형처럼 뾰족하게 마무리되어 있다. 복부 앞에는 옷자락이 ‘W’ 자형으로 대의 속에 삽입되어 있다. 두 다리 사이의 옷주름은 중앙의 폭넓은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 주름이 거의 대칭형으로 퍼져 있고, 발목에서 형성된 옷주름은 무릎 방향으로 세 줄의 음각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왼쪽 다리 위로 올린 오른발 아래에는 파상형의 옷자락이 부드럽게 조각되어 있다. 양손은 허벅지에 닿을 듯이 낮춰서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한 아미타 수인을 결하고 있다.
[특징]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은 오른팔을 높이 올린 조선 후기에 조성된 일반적인 아미타불상의 수인과는 달리 양팔을 허벅지에 닿을 듯이 낮춘 것이 특징적이다. 두 다리 사이에 여덟팔(八) 자 모양으로 폭넓은 옷주름의 형식과 배 앞에서 ‘W’ 자 모양으로 옷자락을 대의 속으로 삽입한 형식 등 전반적으로 조선 17세기에 조성된 현진(玄眞)·청헌(淸憲) 파 조각승인 승일(勝一)과 희장(熙藏)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다.
[의의와 평가]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은 안정감이 있고 균형 잡힌 불상으로 상의 자세와 세부 표현에서 17세기 중반 조각승 승일과 희장이 제작한 불상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문수사 목조여래좌상은 조선 17세기 중·후반에 조성된 불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