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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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逑 |
이칭/별칭 | 도가,한강,문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덕진 |
[정의]
조선 후기 동복 현감을 지낸 문신.
[개설]
정구는 1584년 동복 현감을 지냈고, 강원도 관찰사, 형조 참판 등을 역임했다.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운 동방심학(東方心學)의 대종(大宗)이다.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이다. 철산 군수(鐵山郡守) 정윤증(鄭胤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부사맹(副司孟)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고 부인은 봉사(奉事) 이수(李樹)의 딸이다.
[활동 사항]
정구(鄭逑)[1543~1620]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자질을 지니어 신동이라 불렸다. 일찍이 향시(鄕試)에 뽑혔으나 회시(會試)에 응하지 않았다.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을 찾아가 교분을 맺었다.
1580년(선조 13) 창녕 현감으로 부임하여 마을마다 서재(書齋)를 설치하고, 향교에서 학문을 토론하며 고을의 풍속 교화에 힘썼다. 1581년 지평(持平)이 되고 고을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사모의 정을 표했다. 1584년 동복 현감을 맡아 창녕에서와 같이 잘 다스렸는데, 『동복지』라는 읍지를 완성하였고, 향사례를 시행하고 학문을 크게 진작하여 현민의 칭송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뒤에 동복 현민들이 도원 서원을 지어 향사하였다. 공조 정랑, 장악원 첨정에 제수되었고, 1586년 함안 군수(咸安郡守), 1591년 통천 군수(通川郡守)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였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부임했다. 1594년 동부승지가 되고, 1595년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로 승진하였고, 상호군(上護軍)에 제수되었으며 판결사(判決事)와 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하였다. 1596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영원 산성(鴒原山城)을 쌓았고, 부호군(副護軍)과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다. 1597년 우부승지, 호군, 판결사, 성천 부사(成川府使)를 역임하였다. 1598년 가선(嘉善)으로 승진하고, 1600년 호군(護軍), 부총관(副摠管), 형조 참판, 관상감 제조를 맡았고, 1601년 교정청에 머물렀다. 1602년 충주 목사(忠州牧使), 교정청, 호군(護軍)을 거쳤다. 1607년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1620년 정월에 대구시 칠곡 사수동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78세였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학문과 저술]
외증조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모든 것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말년(末年)에는 강술(講述)에 전념하였고, 문장(文章)은 주자(朱子)를 따랐다.
『성현 풍범(聖賢風範)』, 『중화 집설(中和集說)』,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고금 충모(古今忠謨)』, 『고문 회수(古文會粹)』, 『와룡지(臥龍志)』, 『곡산동암지(谷山洞菴志)』, 『낙천 한적(樂天閑適)』, 『유선 속록(儒先續錄)』 등은 1614년 불타버렸고, 『예기 분류(禮記分類)』, 『춘추 유례(春秋類例)』, 『치란 제요(治亂提要)』, 『경세 기년(經世紀年)』, 『경현 속록(景賢續錄)』 등은 모두 탈고(脫稿)되지 않았으며, 『수사 언인 부록(洙泗言仁附錄)』, 『심경 발휘(心經發揮)』, 『오선생 예설(五先生禮說)』, 『주자시 분류(朱子詩分類)』, 『고금 인물지(古今人物志)』, 『고금 명환록(古今名宦錄)』, 『오복 연혁도(五服沿革圖)』, 『역대 기년(歷代紀年)』 등이 남아 있다.
[묘소]
1607년 경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동 창평산(蒼坪山)에 장사지냈고, 1663년 성주읍 금산동 인현산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1620년 문목(文穆)의 시호를 받고 인조반정 후에 이조 판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고, 1623년 천곡 서원(川谷書院)에 배향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1633년에 묘소 부근에 세워졌는데 이장하면서 1668년에 회연 서원으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