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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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益魯 |
영어공식명칭 | Kim Ikro |
이칭/별칭 | 미방(米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섭 |
출생 시기/일시 | 1845년 - 김익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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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15년 - 김익로 사망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일신리 |
묘소 | 전라남도 해남군 황산면 일신리 |
성격 | 화가 |
성별 | 남 |
본관 | 김해(金海) |
[정의]
개항기 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화가.
[개설]
김익로(金益魯)[1845~1915]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됐던 김영석(金泳錫)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부터 글 읽는 것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해남의 화맥을 이어 받고 있다. 김익로(金益魯)는 대흥사 일지암에 독거하고 있던 초의선사(草衣禪師)를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초의선사와 교류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를 만나 그들의 학문도 사사받았는데 이때 진도 출신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2]과 동문이 되었다.
[가계]
김익로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미방(米舫)이다. 아버지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된 김영석(金泳錫)이다. 소방(小舫) 김홍주(金洪柱)[1864~?]와 난원(蘭苑) 김환주(金煥柱)[1877~?]가 아들이다.
[활동 사항]
김익로는 대흥사(大興寺) 일지암(一枝庵)에 독거하고 있던 초의선사를 찾아가 학문을 배우고 초의선사와 교류했던 추사 김정희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진도 출신 소치 허련과 동문이 되어 예술적으로 교류하였다.
김익로의 글씨와 그림은 김정희와 허련의 풍을 따랐으며, 북종화와 남종화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작품 활동을 한 시야가 넓은 그림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산수화뿐만 아니라 화조도, 기명절지[문방사우와 그릇 등], 사군자 등에 두루 능하였다. 김익로의 이러한 재주는 아들에게로 이어져 군수를 지낸 김홍주와 김환주도 시서화에 능하였다.
김익로는 점점 명성이 높아져 3년가량 운현궁에 머물며 당시 최고의 권세가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돈독한 교분을 가졌다. 미방이라는 호도 흥선대원군이 김익로의 그림과 글씨를 높이 평가해서 내린 것이라고 한다.
이후 해남으로 낙향한 김익로는 해남읍 홍교다리 인근에 ‘벽계청장관(碧溪靑嶂館)’이라는 서재를 만들고 후학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쳤다. 만년에는 황산면 일신리 천마산(天馬山) 아래 농가에서 유유자적하게 살다가 1915년 7월 1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김익로의 대표작으로는 「괴석도」가 전한다.
[묘소]
김익로의 묘소는 해남군 황산면 일신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