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1005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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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溪鄭氏 |
영어의미역 | Chogye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광명시 |
집필자 | 김지석 |
세거지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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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 |
입향시기/연도 | 16세기 |
성씨시조 | 정배걸 |
입향시조 | 정호 |
[정의]
정배걸을 시조로 하고 정호를 입향조로 하는 경기도 광명시 세거성씨.
[개설]
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로, 초계정씨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1017년(현종 8)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상서·중추원사를 지냈다. 개인 서당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며 문종 이후 개경의 12사학 중 하나인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었다. 이에 후세 사람들은 유가(儒家)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尊師)라 불렀다. 좌복야 참지정사(特進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된 아들 정문(鄭文) 이후 초계정씨는 내급사공파(內給事公派), 천호장공파(千戶長公派), 대제학공파(大提學公派), 박사공파(博士公派),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등 5개 파로 나누어졌다.
정종영(鄭宗榮)[1513~1589]은 관찰사·우찬성, 정엽(鄭曄)[1563~1625]은 우참찬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정온(鄭蘊)[1569~1641]은 1614년(광해군 6) 강화도에 귀양 간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하여 강화부사 정항의 처형을 주장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어 10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풀려 나와 경상관찰사·이조참판을 지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은둔하였다. 저서로 『동계문집(桐溪文集)』이 있다. 정기광(鄭基廣)[1597~1665]은 우승지를 지냈다.
[입향경위]
『초계정씨대동보(草溪鄭氏大同譜)』에 따르면, 약 450년 전 정배걸의 18세손인 정호(鄭湖)가 광명시 일직동 자경리에 정착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정호는 사헌부감찰을 지냈고, 후손 정성남(鄭誠男)은 현감을 지냈다.
[현황]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국에 거주하는 초계정씨는 총 2만 9264가구에 9만 3586명으로 경기도에는 5,337가구에 1만 7769명이 거주하였다. 현재 광명시 일직동에 32대손 6가구가 18대 정호로부터 15대째 세거하고 있다.
수정일 | 제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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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3 | [개설] 수정 | <변경 전>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으로/정배걸 이후 초계정씨는/정엽(鄭曄)[1563~1625]은 우참찬, 정종영(鄭宗榮)[1513~1589]은 관찰사·우찬성, 정기광(鄭基廣)[1579~?]은 한성부좌윤, 정선은 대제학을 지냈다. <변경 후>초계(草溪)는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로, / 좌복야 참지정사(特進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된 아들 정문(鄭文) 이후 초계정씨는/ 정종영(鄭宗榮)[1513~1589]은 관찰사·우찬성, 정엽(鄭曄)[1563~1625]은 우참찬을 지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 정기광(鄭基廣)[1597~1665]은 우승지를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