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54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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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錫天 |
영어공식명칭 | Jang Seokcheo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03년 2월 25일 - 장석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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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7년 3월 - 장석천 성진회 회원들의 항일의식 고취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4월 - 장석천 전라청년연맹 당무위원 선출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장석천 신간회광주지회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12월 - 장석천 신간회광주지회 상무간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3월 - 장석천 전라남도 광주 지역 내 학생들과 항일운동 방안 협의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4월 - 장석천 독서회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1월 3일 - 장석천 광주학생독립운동 학생투쟁지도본부 설치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1월 12일 - 장석천 학생전위동맹 간부들과 서울 지역 학생의 거사 계획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2월 - 장석천 일본 경찰에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0월 - 장석천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6월 - 장석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 확정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12월 24일 - 장석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10월 18일 - 장석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2년 - 장석천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장석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송곡리 287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누문리 218번지 |
학교|수학지 | 보성고등보통학교 - 경성 중부 박동 10통 1호 |
학교|수학지 | 수원고등농림전문학교 - 경기도 수원군 |
활동지 | 성진회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
활동지 | 신간회광주지회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전라청년연맹 당무위원|신간회광주지회 상무간사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장석천(張錫天)[1903~1935]은 1927년 3월부터 광주학생 항일 비밀결사 단체인 성진회(醒進會)와 독서회(讀書會)를 주도하였고,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광주지방법원 재판을 거쳐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32년 12월 24일 경성방직공장 소요 문제로 다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장석천은 1918년경 경성으로 올라와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를 거쳐 보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보성고등학교]와 수원고등농림전문학교[1946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병합]를 졸업하였다. 1926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지금의 히토쓰바시대학] 예과를 다니다가 4개월 만에 퇴학당하였다.
1926년 7월 귀국하자마자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학생 항일 비밀결사 운동단체인 성진회에 가입하였고, 1927년 3월 성진회 회원을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내 중국 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전라청년연맹 당무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0월에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에 가입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신간회광주지회의 상무간사로 임명되는 등 학생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9년 1월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 여도현(呂道鉉)에게 "항일투쟁의 강화는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그해 3월 광주 지역 내 각 학교의 졸업 시기를 맞아 임종근(林鍾根) 외 4명을 광주읍내 중국 요리점에 초대하여 항일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4월에는 조길룡(趙吉龍)·김상돌(金相突)·송동식(宋東植)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5월에는 최규창(崔圭昌), 나승규(羅承奎), 김상환(金相奐), 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독서회원의 재정 활동을 지원하고자 소비조합 결성을 준비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장석천은 장재성(張載性), 박오봉(朴五鳳), 강석원(姜錫元), 국채진(菊埰鎭) 등과 함께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학생 투쟁을 지원하였다. 11월 7일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에서 파견한 권유근(權遺根)과 만나 학생운동 확대 방안을 논의하였다. 11월 12일에는 서울 지역으로 잠입한 학생전위동맹의 간부 차재정(車載貞), 정종근(鄭鍾根), 곽양훈(郭良勳) 등과 만나 서울 지역 학생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1929년 12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내용과 항일투쟁 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2만여 장을 인쇄하여 전국에 발송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보안법」, 「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다음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경성방직공장 소요 때 종업원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다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뒤 1934년 12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