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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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四采 |
영어공식명칭 | Gang Sachae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노기욱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2월 3일 - 강사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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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1월 11일 - 강사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백지동맹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99년 11월 24일 - 강사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9년 8월 15일 - 강사채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 171 |
거주|이주지 | 전라남도 광주부 광주면 명치정 5정목 125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여 |
대표 경력 |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한 여성 독립유공자.
[개설]
강사채(姜四采)[1915~1999]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須奇屋町)[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에서 태어났다. 강사채의 오빠 강해석(姜海錫)[1904~1973], 강영석(姜永錫)[1906~1991], 강석원(姜錫元)[1908~1991]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9년 11월 11일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백지동맹(白紙同盟)에 참여하여 동지 석방 투쟁과 동맹휴학 등을 주장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활동 사항]
강사채의 오빠 강해석은 1927년 3월 광주항일학생 결사체를 학교별로 조직하도록 지도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강영석은 1939년 12월 2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강석원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하고 동지와 연락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강사채는 오빠들의 비밀 편지를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연락책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9년 11월 11일 강사채는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전남여자고등학교] 1학년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한 축인 백지동맹에 참여하였다. 백지동맹을 주도한 인물은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이었던 최순덕(崔順德)이었다. 최순덕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부면장 박계일의 딸인 3학년 박지의 협조를 받았다. 거사 전날 박지의 고모 집에서 전단지 150여 장을 만들었다. 1929년 11월 11일 학교에 일찍 도착하여 등교생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기에 앞서 각 학급을 돌며 칠판에 '시험 거부' 투쟁에 대해 적었다.
강사채를 비롯하여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 모두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구속 학생 석방하라", "식민지 교육 철폐하라", "중간고사 거부한다",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을 외쳤다. 그리고 동지 석방 투쟁, 동맹휴학 등을 주장하였다.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백지동맹과 학생운동에 참여한 대표적 인사들은 강사채를 비롯하여 이광춘(李光春), 박기옥(朴己玉), 이금자(李錦子), 박계남(朴繼男), 주말순(朱末順), 김두채(金斗采), 최풍오(崔豊五) 등 47명에 이른다. 강사채는 일제에 체포되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9년 8월 15일 정부에서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