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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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甄萱 |
영어공식명칭 | Kyun Hwo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후백제 |
집필자 | 문다성 |
[정의]
남북국시대 서남해 비장을 역임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후백제의 시조.
[가계]
견훤(甄萱)[892~936]의 출신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견훤전에 따르면 견훤은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뒤에 견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상주 가은현(加恩縣)[경상북도 문경군 가은읍]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된 아자개(阿慈介)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이비가기(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眞興王)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할 수 없다. 『삼국유사(三國遺事)』 후백제 견훤조에 실린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의 여인이 지렁이와 혼인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는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 지역의 호족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주지만 명확하지 않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견훤의 어머니는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이며, 성씨는 알 수 없다. 견훤은 맏아들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용개(龍蓋)·보개(寶蓋)·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활동 사항]
견훤은 성장하여 수도인 경주(慶州)에 들어갔다가 서남해안의 국경을 지켰으며 뒤에 비장(裨將)[벼슬의 일종]이 되었다. 892년(진성여왕 6)에 무리를 규합하여 왕경의 서남해안의 주현(州縣)을 공격하였으며, 5천 명 규모로 세력이 성장하였다. 892년(진성여왕 6) 무진주(武珍州)[광주광역시]를 습격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또 스스로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2000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하였다. 광주광역시의 무진고성과 광양시의 마로산성 등의 유적과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의 무진주·전라도 지역에서 세력을 떨쳤던 견훤 정권의 모습을 보여 준다.
900년(효공왕 4)에 견훤은 서쪽으로 순행하여 완산주(完山州)[전라북도 전주시]에서 마한(馬韓) 계통 의식과 백제(百濟)의 개국, 의자왕(義慈王)의 설욕을 표명하며 스스로를 (후)백제왕이라 일컬었고 관부와 관직을 두었다. 또 일찍부터 외교에 힘써 오월(吳越)[중국 오대십국 가운데, 907년에 당나라 절도사였던 전유가 항주(杭州)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이후 후당(後唐)·거란(契丹) 등과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다.
901년(효공왕 5) 신라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는 금성(錦城)[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이 후고구려에 투항한 것에 반격하였으며, 912년(효공왕 16)에는 덕진포(德津浦)[영암 일출산의 서쪽 포구 혹은 충청남도 대덕군 회덕]에서 후고구려군과 전투하였다.
920년(경명왕 4)에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924년(경애왕 1)에는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927년(경순왕 1)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지금의 경북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족제(族弟)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이때 구원군으로 온 왕건의 군대를 상대로 공산(公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견훤은 929년(경순왕 3) 고창군(古昌郡) 전투에서 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패전하면서 점차 쇠락하였고, 932년(경순왕 6)에는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견훤은 같은 해 예성강(禮成江) 어귀에 침입하여 전함 100여 척을 불태우고 말 300여 필을 노획하였다. 934(경순왕 8)년에는 운주(運州)[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를 공격했으나 대패하였고, 웅진(熊津)[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총애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첫째 아들 신검(神劍)은 동생인 양검(良劍)·용검(龍劍), 이찬(伊飡)[신라 때에 둔, 17관등 가운데 둘째 등급] 능환(能奐), 파진찬[신라 때에 둔, 17관등 가운데 넷째 등급] 신덕(新德)·영순(英順) 등이 935년(경순왕 9)에 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3개월 뒤에 금성으로 탈출하여 고려 왕건에게 스스로 복종하였다.
왕건은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尙甫)[아버지와 같이 존경하여 받들어 모시거나 그런 높임을 받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임금이 특별한 대우로 신하에게 내리던 존칭의 하나]의 지위와 식읍(食邑)[왕족, 공신, 대신들에게 공로에 대한 특별 보상으로 주는 영지(領地)]으로 양주(良州)[지금의 경상남도 양산]를 주었다.
936년 견훤은 왕건에게 신검을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고, 일리천(一利川)[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의 강]에서 신검의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후백제도 멸망하였다. 같은 해에 견훤은 연산(連山)의 불사(佛舍)에서 사망하였다.
[묘소]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전 견훤 묘(傳甄萱墓)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 산18]가 있다. 1981년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세기 전반 경상북도 상주에는 견훤사당(甄萱祠堂)[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하송3길[하송리 315-11]]이 건립되어 경상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