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100 |
---|---|
한자 | 興學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35번길 8[광산동 10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재훈 |
건립 시기/일시 | 1921년 - 흥학관 건립 |
---|---|
폐지 시기/일시 | 1942년 - 흥학관 폐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2년 - 흥학관 낙성식 |
소재지 | 흥학관 터 - 광주광역시 동구 문화전당로35번길 8[광산동 100] |
성격 | 옛터 |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청년 문화의 산실이었던 흥학관이 있었던 자리.
[개설]
흥학관(興學館)은 1921년 광주의 부호 최명구(崔命龜)가 희사한 돈으로 최명구의 동생인 최종윤이 지역 청년들의 문화, 체육 활동 진흥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흥학관 설립을 맡은 최종윤은 1920년 광주청년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총무와 기자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흥학관은 실내 체육과 강연 등 문화 행사가 가능한 흥학관 건물과 건물 앞의 너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학관 내부는 유도나 권투 교습의 체육 활동을 비롯 광주청년회, 신간회 광주지회, 조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 외에도 광주여자청년회 주도의 여자 야학 및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진행하는 야학도 흥학관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넓은 실내 공간을 이용한 각종 강연회도 개최되어 송진우(宋鎭禹), 안재홍(安在鴻), 방정환(方定煥) 등 유명 인사의 강연회가 열렸다. 흥학관 앞의 마당은 연식정구대회를 비롯한 각종 체육 행사장으로 활용되었다.
[변천]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건물과 부지가 광주부청(光州府廳)에 넘어가게 되어, 전시의 광주식량배급조합 사무실과 창고 등으로 활용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초대 광주시의회 의사당으로 활용되는 등 광주 지역 정치사 측면에서 갖는 의미도 남다르다. 그러나 1969년 10월 초 경양방죽을 매립한 계림동 505-900번지에 새로운 시청 건물이 완공되자 철거되었다. 현재는 상업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위치]
흥학관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구 광산동 100번지 일대로 광산동 100-1~100-42로 분할된 필지 위에 있었다. 이 중 상당수는 광주면사무소[이후 광주부청] 자리였으나, 담 하나를 두고 나란히 붙어 있던 흥학관은 목조의 1층 건물 및 앞마당의 운동장 등을 고려하면 상당히 넓은 공간 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1926년·1932년·1939년에 제작된 지도 등에서는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현황]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 지역 내의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흥학관 터'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강점기 흥학관은 전라남도 광주 지역 청년들의 사랑방이자 지역민의 문화, 체육, 교육, 집회 공간으로 사용되는 등 공회당이나 시민문화관 등에 비견할 만했다. 이를 개인의 희사(喜捨)로 마련했다는 점에서 흥학관과 관련된 최종윤이나 최명구의 활동도 눈여겨 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