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753 |
---|---|
한자 | 鐘紡光州製絲工場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차혜진 |
설립 시기/일시 | 1930년 - 종방광주제사공장 설립 |
---|---|
최초 설립지 | 종방광주제사공장 -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 |
성격 | 기업체|공장 |
설립자 | 가네보방직회사 |
[정의]
일제 강점기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 있었던 일본 가네보방직회사 소속 제사 공장.
[개설]
종방광주제사공장은 1930년 일제의 가네보방직회사가 현재의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의 삼익세라믹맨션 자리에 설립한 제사공장이다. 일제가 조선에서 면화를 충당하기 위해 전국 각 지역에 설립한 제사공장의 하나로서 일제 식민지 통치의 유물이다.
[설립 목적]
종방광주제사공장은 일제강점기 생사의 가공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30년대 일본 굴지의 방직 회사였던 가네보는 직물의 원료인 생사(生絲)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생사 확보를 위해서는 대규모 뽕밭과 잠실이 있어야 했고, 특히 규모가 큰 편인 두 개의 공장이 있는 광주 일원에서 안정적으로 생사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컸다. 가네보는 한국의 값싼 노동력을 한 곳에 붙들어 매고, 한편으로는 기업 촌락(company town)으로, 다른 한편으론 봉건 영주의 직할지처럼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였다. 그 마을이 가네보의 한국식 이름인 ‘종연방직(鐘淵紡織)’ 혹은 이를 줄인 ‘종방’이라는 이름을 딴 마을, 즉 종방마을이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는 이렇게 형성된 마을이 수십여 개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에 종방이 들어선 것도 철저히 일제의 침략적 욕구였다. 일본에서 방직 산업은 저임금이 경쟁력이었고, 1930년 대공항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미국의 침체를 틈타 시장 석권을 노리던 과정에서 조선에 눈을 돌린 결과였다. 일본 측은 당시 총독부의 공장 유치 노력이 조선 진출의 직접적 계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의 공장법 개정으로 부녀 및 연소자의 심야 노동 금지 등의 조치로 인해 임금이 오르자 저렴한 노동력을 찾아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것이 지금의 전방과 일신방직 자리에 들어선 종연방직 전남공장이었다.